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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노무현, 그리고 이명박

역사&문화/Talk to History

by 편집국장 2018. 10. 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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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군을 꼽으라면 대부분 조선 초기 문화와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전성시대를 꽃피게 한 세종과 조선후기 합리적 문화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의문의 죽음으로 사라져간 정조 그리고 효심이 깊고, 타고난 재능과 능력을 갖췄으나 역시 일찍 생을 마감한 인종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요즘 말로 하면 막장, 그 시대의 최악의 임금을 꼽자면,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 폭군으로 변한 연산군, 조선 최악의 전란에 아무런 준비도 못 하고 있다가 전란이 일어나자 궁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으며 그런 전쟁을 이겨낸 장수와 흉흉한 민심을 수습한 세자를 오히려 의심하고 견제한 선조, 그리고 스스로 반정을 일으켜서 왕이 된 후 삼전도의 치욕을 맞이한 인조가 대표적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것, 기록자의 것이기 때문에 인조 재위 이후 역사 속에서 광해군은 연산군과  동급의 패륜을 저지른 조선 최악의 군왕으로 기록되고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박정희, 이명박을 비판하고 외면하는 것이 자기 부정이기에 군부 독재정권을 포장하고 미화시키는 것 같이 인조와 인조 이후의 왕들로서는 정통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더구나 조선은 성리학을 기초로 한 명분을 중시하는 왕조)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 인조를 미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듯이 광해군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시절이 길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긍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음) 400여 년 전 광해군과 인조, 그들은 지금의 노무현과 이명박과 너무 닮아있습니다.
 

광해군, 전란으로 파탄 난 나라를 물려받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도망간 임금과 문무백관 그리고 사대부들에 대한 백성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탄 궁궐은 왜군이 아닌 백성이 불 지른 것이었고, 피난 중인 선조에게 비난하고 심지어는 돌을 던지는 경우까지 비일비재할 정도로 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이런 혼란의 시대에 세자로 책봉되어 맹산, 곡산, 이천 등지를 순회하면서 왜군을 교란시키고 백성을 위무하며 왕이 해야 할 일을 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광해군은 적자(왕의 정비 소생)가 아닌 후궁의 소생이었습니다. 정비의 소생이 없던 선조가 즉위 말년시절 51살 되던 해 19살의 정비를 맞이했는데, 그녀가 인목왕후였습니다. 그리고 그 인목왕후로부터 적자가 태어났는데 바로 영창대군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잘 수습하고 나가고 있었음에도, 대신들의 흔들기와 선조의 우유부단함 등으로 인해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결국 선조의 승하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조의 광해군 폐위 이유 중의 하나인 형제들을 죽이고 대비를 폐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아직 국난으로 나라가 혼란스럽고 자신은 적자가 아닌 상태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되었는데, 분명 동복형제와 이복형제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광해군은 신하들의 주청을 극구 반대했다고 하지만 결국엔) 잘못이긴 하지만, 조선 초기 태종과 그리고 세종의 아들 세조도 이복형제와 동복형제를 제거한 후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오히려 훌륭한 왕으로 추존받고 있음을 볼 때 억울한 측면도 강합니다. 더구나 영조의 경우엔 친아들 적자인 사도세자를, 인조의 경우도 친아들 적자인 소현세자에 대한 독살 가능성이라는 큰 패륜을 저지른 것을 봤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한 것으로 패륜아로 낙인찍혔지만, 계대비인 정순왕후와의 갈등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정조나 조선 최악의 왕비로 꼽히는 문정왕후를 계비로 두고 마찬가지로 독살설로 세상을 떠난, 살았으면 조선의 또 하나의 성군으로 기록되었을 인종을 생각한다면 계비를 두고 정치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했을지는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인조반정과 그 이후 인목대비의 행동을 본다면)

 오히려 광해군 시절 민심은 광해군으로 향해 있었고 폐비 사건은 궁중에서 자주 일어났던 왕비나 세자빈의 폐비 사건 정도로 여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노무현도 만만치 않은 어려움에서 집권하게 됩니다. 물론 IMF라는 큰 산은 김대중 정부에서 끝냈지만 그것을 끝내기 위한 경기부양책이었던 카드남발로 인한 신용대란, 부시의 집권과 이라크 전쟁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상황을 통한 유가상승과 북한과 미국 간의 알력다툼 등 어려운 상황에서 집권하게 됩니다.

 세금의 개혁, 국가재정의 확보

 왜란으로 파탄 난 경제살리기와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광해군은 혁신적인 조세개혁인 대동법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는 백성에게 압박으로 다가온 공납제도의 개혁으로 조세정의를 위한 개혁이었으며 양반 지주층의 반발을 몰고 옵니다.

 또한 조세를 정확히 조사하기 위해서 양전사업(토지조사사업)을 하게 됩니다. 즉, 누가 어디에 얼마의 땅을 가지고 있는지 조사하여 세금을 매기는 것으로, 원칙적으로는 20년에 한 번씩 시행되어야 할 제도였으나 조선왕조 통틀어 4번 정도밖에 시행되지 않은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가 시행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양안을 기록하여 각 관청에 두게 되는데, 지금도 있는 자들이 더 세금을 안 내려는 것처럼 당시도 사대부들은 자신의 이름을 빼버리고 나라에서 주는 녹만 타 먹고 세금은 내지 않아 백성만 세금을 내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양전사업과 대동법 시행으로 광해군은 백성의 민심을 잡게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기득권들의 거센 반발을 받으면서 종부세(종합부동산세) 등의 세금변화와 여당의 삽질과 야당의 반대로 누더기가 되었지만 4대 개혁법안(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등으로 대표되는 개혁적 정책 등을 실시하거나 시도하였습니다.

 한편, 광해군은 국가의 위신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란으로 소실된 궁궐의 재건을 추진하였으나 오히려 노역에 동원된 백성의 불만과 반정의 또 다른 명분을 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궁궐 재건은 조선의 어느 군주라도 시급히 해야 했을 사안이었기 때문에 광해군으로서는 그것을 나서서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전 정권에서 해결하지 못한,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사패산 터널 문제, 방폐장 문제, 과거사 재조명과 정부차원에서의 사과, FTA 타결(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등의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수도 이전 추진

  정조가 화성으로 수도 이전을 하려 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광해군이 수도 이전을 추진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광해군은 경기도 파주 교하 일대에 신도읍지 건설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왜란 이후 민간에 널리 퍼졌던 풍수지리에 입각한 이씨왕조멸망설(정씨가 왕이 된다는)을 일축시키고 사회 전반을 쇄신하기 위해 추진하려 했으나, 전쟁 후 피폐함과 흉년으로 인해 백성의 불만과 인플레이션 유발을 걱정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광해군이 물러남에 따라 정조의 시도가 있기까지 수도 이전은 거론되지 못했습니다. 수도 이전은 안보를 위해서, 경제를 위해서 긍정적 이유로 추진하려 했지만 당시 상황이 허락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금 다른 상황이기는 하지만 수도권과 지방의 차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져서 각종 문제에 시달리는 수도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도 수도 이전을 추진하였으나, 기득권층의 반발에 헌법소원까지 가는 과정에서 위헌으로 판결이 나 행정수도로 일부 행정기관을 이동하는 선으로 추진하게 됩니다.

작은 나라,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빛난 자주적 실리외교

 이미 중화주의로 조선 지배층 사대부들이 받들던 명나라는 나라가 기울어가고 있었고, 반대편에서 서양문물을 흡수한 중화주의자들이 오랑캐로 적대시하던 청(후금)은 커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광해군은 명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또한 청의 도발을 막을 수 있는 양국을 오가는 자주적 실리외교에 힘쓰게 됩니다. 사대주의와 성리학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조선의 왕으로서는 파격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의 외교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의리든 명분이든 조선 지배논리에 입각해 명을 돕게 되면, 안 그래도 어려운 전란 이후 나라상황에서 엄청난 국가적 손실과 존망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국제정세에 관한 날카로운 분석력과 소신과 결단력으로 외교를 추진했습니다. 당시 신료들 중 외교전문가가 없는 와중에 일일이 외교를 챙겼다고 합니다.

 다급해진 명의 요청에 강홍립을 마지못해 파견하나 이미 청의 누루하치와 비밀조약을 통해 출정 제스쳐만 취하고 항복을 하는 실리적 선택을 하게 됩니다. 즉, 내부의 사림과 명의 명분을 잡고 청과 비밀협약으로 실리까지 챙기는 그야말로 대국 사이의 작은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군주였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끊겼던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시켜 남아 있던 왜국과의 전쟁위협을 해소하고 경제적 이용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노무현 대통령도 실리외교 자원외교로 대표되는 외교를 통해 한반도를 가운데 놓고 벌어지는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특히 북한과 정상회담을 김대중 정부에 이어 성사시킬 정도로 남북관계도 좋게 유지하며 유라시아 경제권, 북한과 연계한 대륙과 이어지는 횡단열차, 북한의 막대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한반도의 새로운 경제를 위해 또한 평화를 위해 외교를 실행합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원 확보에 힘써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고 무엇보다 세계 어느 곳 모든 지도자들에게 신뢰를 확보하였고, 미국이 서서히 힘이 떨어진다는 것에 대비해 EU로 대표되는 유럽 그리고 중국 등 새로운 쪽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광해군이 외교를 직접 챙긴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 또한 내치는 책임총리제로 총리에게 챙기게 하고 자신은 외교와 굵직한 현안 해결에 힘쓴 것입니다.

 지난해 12월 28일 Howard W. French라는 기자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에 노무현 정부의 외교성과에 대해 “동아시아 문제를 다루는 소수의 전문가들을 제외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감당한 역할을 이해할 만한 미국인들은 별로 없다. 확실한 것은 한국에서 선출된 지도자가 북한 위기에 대해 어떠한 군사적 해결도 반대한다고 천명함으로써 미국 정부는 점진적으로 외교적 수단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다른 실질적인 방안을 강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중략> 미국과 북한은 결국 협상을 통해 핵확산 문제와 궁극적 관계정상화에 관해 보기 드문 외교적 이해에 이르렀다” “그는 변방에 있는 작은 국가의 지도자였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라고 극찬하며 평가 했습니다

 또한 마이클 그린 전 백악관 보좌관은 중앙일보에 부시와 노무현의 비화를 밝히며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친미 대통령이었던)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라고 평가하며 “중국이 미국 측에 아시아에서 미국을 주축으로 對中 친미동맹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그 동맹국으로 일본,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을 언급하면서 한국만 쏙 뺐다”고 일화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한미 관계에 관심이 있는 미국 기자의 눈에나 부시의 고급관료 눈에 비친 노무현 대통령은 강대국 미국에 대해 굽히지 않고 냉온전략을 사용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한미 동맹관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으며 그 와중에도 북한, 중국과도 척을 지지 않는 훌륭한 양면외교를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국익을 지키려다 사대주의자들에게 쫓겨나 일개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현대에 와서야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양면외교 솜씨를 인정받고 당쟁의 희생자로 불리는 광해군 이혼(李琿)과 노무현, 둘은 그렇게 닮아있습니다.

 세력이 없는 정권

  광해군 정권의 주 인물들은 대북파로 불리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사대부에서 비주류에 속하는 인물들로, 몰락해가던 서인과 같은 북인에서 갈라져 나온 소북파 등과 적대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참여정부시절 이른바 노무현 세력은 보수세력에는 좌파빨갱이로, 진보세력에는 보수자유주의 세력으로 비춰집니다. 이 당시도 마찬가지여서 대북세력은 명분을 외면한 위험한 세력으로 비춰져, 참여정부 당시 한나라당과 민노당으로 대표되는(지금은 민노와 진보신당으로 나뉘었지만) 극과 극이 참여정부를 헐뜯은 것처럼, 소북과 서인 모두의 공격을 받고 결국엔 반정으로 집권세력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최악의 군주 인조, 그와 닮은 이명박

  앞서 언급한 폐비사건으로 대표되는 패륜과 실리외교란 명분 아래 인조는 스스로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인조반정입니다. (연산군 당시 중신들이 반란 후 추대한 중종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리고는 정통성을 위해 광해군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특히 반정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명과의 외교를 강화하고 청을 배척하게 됩니다. 광해군의 외교를 오랑캐와의 외교로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가 되게 한 외교였다 비난하고 외교뿐 아니라 모든 정책에서 광해군과 반대되는 정책을 내놓고 추진합니다. (광해군이 틀려야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광해군의 모든 것을 부인합니다)

 400년 후 이 땅에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명박을 대표로 하는 한나라당 정권은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평가하고 ‘Anything But Roh’로 대표되는 참여정부 길게는 국민의 정부와 반대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는 곧 국가적 피해, 국민적 피해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400년 전 백성이 광해군을 인정하고 인조를 무시한 것처럼 지금 이 땅에서 자신들의 손으로 대통령을 만들긴 했지만 다시 국민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하고 이명박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독재정권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IMF를 해결한 민주정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이야기하는 상황은 전란을 무사히 복구하고 다시 안정화시킨 광해군을 폭군으로 묘사한 상황과 지금과 닮지 않았습니까?

 비슷한 상황은 외교에서도 발생합니다. 인조는 광해군의 ‘친금배명’ 정책을 빌미로 반정을 했는데 명나라는 찬탈로 인식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명나라는 광해군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조선 조정이 광해군을 비하하는 글을 명나라에 지속적으로 보내자 명나라는 “인조의 마음속에는 비단 광해군뿐만 아니라 중국도 없다. 당연히 선유하여 그 죄를 밝혀 조선 백성들로 하여금 속히 반역의 도적을 토벌하고, 폐주를 복위하게 해야 한다. 설령 조선 백성이 인조를 군주로 삼았더라도 당연히 폐위시켜야 한다”라는 답변을 내립니다.

 이에 인조 조정은 “조선의 200년 사대지성이 모두 허위로 돌아갔다. (중략) 과인은 당연히 명과 협력해 기필코 오랑캐를 무찔러 없앨 생각이다”라는 교지를 발표하고 이에 명나라는 사건진상규명단을 보내고 조선 측은 사신에게 은자 약 13만 냥을 접대비로 준비했지만 명나라 사신들은 성에 안 차 개성의 인삼을 요구했고, 조선 측이 그것을 들어주고서야 상황이 일단락됩니다.

 지금의 상황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이명박 정권은 전임정권 시절 악화하지도 않은 오히려 대한민국 래 미 관료 스스로 가장 좋았다던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외치며 이미 막바지인 부시 정권에 예쁘게 보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인조가 접대비에 개성인삼까지 준 것처럼 미국산 쇠고기라는 선물을 안겨준 것은 너무 닮지 않았습니까?

 또한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대외정세를 파악 못 하고 주제넘게 이어진 청을 향한 무시는 지금 북미관계의 회복과 EU의 위상강화, 중국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각종 외교적 결례만을 범하다 북한에 무시당하고, 인조시절 반청을 외친 오버처럼 핵무장까지 언급하는 의원을 가진 정당과 북한을 아직도 탓하는 이명박과 닮지 않았습니까?

 당시 명과 청에 모두 무시당한 인조처럼 지금 미국을 비롯한 북한 중국 러시아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심지어 제3세계로 불리는 국가들에도 무시당하는 이명박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세계의 흐름을 모르고 망해가는 명국에 매달린 인조와 국제질서의 재편과 미국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흑인은 대통령이 안 될 거라 판단하고 부시와 공화당에 올인한 이명박정권은 쌍둥이지 않습니까?

 광해군이 간신히 회복한 조선은 인조 이후 사실상 끝이 나버렸습니다.(물론 비운의 소현세자나 정조가 제대로 살았다면 모를 일이지, 이들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왕비나 대신 등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권은 축소되는 몰락기의 왕조였습니다.)

 웬 광해군과 노무현 대통령을 비교하느냐 실망하거나 기분 나쁜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가 승자의 것이기 때문에 광해군은 묘호를 가지지 못한 것이고 인조는 ‘조’의 시호를 받은 것입니다. (광해군이 묘호가 생기면 인조의 정통성은 물론 이후 군왕들의 정통성도 없어지므로 조선 최고의 왕인 세종도 ‘조’가 아닌 종인데 최악 임금들인 선조나 인조는 ‘조’이므로 묘호로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제대로 평가된다면 광해군은 군이 아닌 ‘조’가 붙어야 하고 인조가 군이 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묘호는 후대 왕이 정하는 것이므로 안타까운 결과로 지금까지 이어지지만)

 광해군이 최근 들어 재평가 받는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도 언젠가는 나오리라 믿습니다. 또 광해군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서가 아니라 빠른 시일에 나오기를 희망하며 그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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