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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3)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건축물 BEST 5

우리나라에도 수 많은 건물들이 있지만, 랜드마크를 확실히 하고 있는 건축물은 아직 없습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전히 성냥갑 같은 건물들이 대다수이죠. 정말 신기하게 생긴 창조적인 건축물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미국 미주리주의 캔자스 시립 도서관입니다. 도서관 옆 주차장 입구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책들이 나란히 서있습니다. 더 멋진 사실은 이를 캔자스 시민 모두가 함께 만들었다는 겁니다. 캔자스 시청이 시민들을 상대로 가장 좋아하는 책을 설문조사 한 후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도서를 뽑아 건물 앞에 나열했으니 모두가 함께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비슷한 컨셉의 도서관입니다. 영국의 웨일스에 있다고 하네요.

 


다음으로 미국의 '롱거버거 빌딩'입니다. 이 건축물은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바스켓 모양입니다. 실제로도 이 롱거버거 빌딩은 바구니를 만드는 회사라고합니다. 회사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이 건물을 기획한 사람은 회사의 CEO인 롱거버거이고 목적은 회사를 알리기 위한 홍보수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네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는 큐빅 하우스도 대표적인 신기한 건축물입니다. 이 건물은 각 큐빅마다 따로 독립된 3층 아파트입니다. 사방이 창문인 큐빅 하우스는 탄성을 자아내는 전망을 자랑하죠.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건축물이 40년전에 건설된 건물이라는 겁니다. 1970년대에 개발된 큐빅 하우스는 디자이너 피에트 블롬의 작품이죠. 



폴란드에도 유명한 신기한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일그러진 집으로 불리는 '크로크드 하우스(crooked house)'입니다. 2층으로 된 크로크드 하우스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건축가 szotynscy zaleski가 동화 속에 등장하는 집을 보고 똑같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을 보러오는 관광객들이 많다고 합니다.


마지막 주인공은 체코의 몰다우 강가에 있습니다. 해체주의 건축가인 미국의 프랭크 게리와 체코의 밀루닉이 함께 설계한 이 건물은 1995년도에 지어졌습니다. 왼쪽은 여자무용수 오른쪽은 남자무용수를 상징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댄싱 하우스로 불립니다. 


창조적인 건축물 하나로 수 많은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는 도시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건축물들이 하루 빨리 태어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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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전통예술, 나전칠기

우연히 나전칠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정보만으로는 조금 부족한감이 국보이야기(ww.kookbo.com)라는 사이트를 운영하시는 유수근 실장님(명인 선생님의 조카라고 하십니다)께 메일을 보내 문의한 결과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螺鈿漆器라 함은 잘 건조되고 눈매가 고운 목재(고사목)를 이용하여 물건의 모양을 제작한 뒤(일명 백골이라고도 함) 여기에 헝겊과 여러가지 材料를 첨가한 뒤 옻칠을 한 뒤에 전복, 소라, 진주, 조개 등의 자개를 갈고 세공하여 수놓은 제품을 통털어서 螺鈿漆器라 합니다. 하나의 완전한 제품이 완성되기까지는 3~6개월의 기간이 소요됩니다.

한국의 螺鈿漆器의 起源을 살펴보면 樂浪時代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古證과 遺物에 의하면 7~10世紀의 統一新羅時代에 螺鈿漆器가 성행하기 시작하였으며, 11世紀나 高麗文宗때

조정에서 螺鈿漆器 제품들을 제작할 수 있게 工房制度를 두어 운영하였고 이곳에서 제작되는 螺鈿漆器들은 외국의 사신들이나 왕에게 선물로 보내졌다고합니다. 오늘날 일본, 독일,

미국, 영국, 화란 등지의 박물관에 소중히 소장되고 있는 것들은 그 당시의 선물로 보내졌던 것으로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螺鈿漆器工藝品이라 할 것입니다.

螺鈿漆器에 사용하고 있는 옻칠은 그 强度가 漆중에서 가장 강한 것이며, 그 壽命 또한 永久不變일것입니다. 光澤은 온화하면서도 유유하고 은은히 빛나는 영롱한 색상입니다.

Najeon Chilgi, the wooden lacquerware inlaid with Mother-of-Pearl, is truly a cultural asset of Korea. The art of Najeon Chilgi is used to make items from jewelry boxes to chests, dressers and desks.

The two main materials used in making Najeon Chilgi are the lacquer coating and mother-of-pearl. Korean mother-of-pearl made from the shining, unchangeable beauty of pearl oyster or abalone, is considered to be the jewel of the Orient.

Traditional technique is a complicated and painstaking process consisting of more than twenty steps. The manufacturing can be roughly divided into several processes; pasting hemp cloth on the surface of the wooden frame; coating the surface with natural lacquer; spraying powdered ox bone on the surface;

inlaying the patterned mother-of-pearl on the pitch black background; and then repetition of lacquering and polishing. It takes 3~6 months to complete a product.

The art of Najeon Chilgi dates back to the Nakrang period.

According to research, Najeon Chilgi already prevailed in the period of Shilla(7~10AD). Then the government operated a workshop system to make Najeon Chilgi products in the reign of King Munjong in Koryo(11AD). The Najeon Chilgi made there were presented to foreign Kings and envoys. Art pieces of Najeon Chilgi are kept in museums of Japan, Germany, U.S.A, England, Netherlands and many other countries all over the world. The varnishing with lacquer is the strongest among varnishes, which makes life of these pieces perman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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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단상


 인문학을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으로 물신주의화하는 관념론자들, 그리고 배부른 사치로 여기는 유물론자들 둘은 동일한 족속이라는 것. 둘다 인문학은 고상한 거라는 허구적 정체성의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혹은 그것에 기반해 있다.

인문학을 제도화하고 거기에 대해서 시장의 분배를 정책적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를초래한 장본인들이다. 그들은 시장에 반대한다면서 동시에 시장의 분배를 그것도 인문학에 대한 특권적 분배를 기대한다. 얼마나 아이러닉한 일인가. (이것은 한국의 인디음악담론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은 삶의 증상이자 삶의 틈새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조건 안에서 곧바로 길어져오는 것이지 특정 제도들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직업이나 제도로서 사회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인문학을 배우는 것을 꺼려하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위기인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제도적, 시장적으로 엄청 호황을 누린다고 해도 그게 꼭 위기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람들이 세계를 자기자신을 타인을 삶을 더이상 사유하려 하지 않는다는, 그 근원적인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꼭 사유를 해야만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유는 삶에서 강제되는 것이다. 더이상 사유가 강제되지 않는다면 굳이 나서서 제도적으로 혹은 시장적으로 사유를 권장할 필요는 없다. 특히 교양화할 필요는 더 더욱 없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외쳤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인문학의 종언을 외쳐야 할지도 모른다. 언젠간 그런 때가 오게 될지도 모른다. 인문학이 삶의 증상이고 간극과 틈새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그런 간극과 틈새가 없는 세계에는 인문학 자체의 필요성도 없어지는 셈이다. 우리 시대가 그런 시대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이 항상 그런 틈새와 간극을 사유하는 것이라는 고진의 말은 인문학의 위기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즉 그런 틈새와 간극이 사라진 시대에는 인문학은 종언을 자연스럽게 맞이한다는 것이다. 

 즉 후역사적, 탈역사적, 포스트모던 시대인 지금 시대는 옛날에 가능했던 틈새와 간극의 사유로서
삶의 증상으로서의 인문학이 더이상 불가능해진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인 것이다. 인문학의 조건이 이미 와해된 것이다. 이 조건은 제도적, 시장적 조건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사유할만한 틈새와 간극 증상이 전부 사라져버린 것에 가깝다. 혹은 적어도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인문학이 항상 항구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이런 관점이 오히려 오류라면 어쩔 것인가. 인문학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인문학의 조건이 이미 와해되버린 시대가 지금이라면 어쩔 것인가. 제도와 시장에 대한 호소는 그 조건의 와해를 감추는 산소마스크라면 어쩔 것인가. 근대문학이 종언한 것처럼 인문학 전체가 종언한 거라면 어쩔 것인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은 있다. 문학이 시대와 세계에 대한 사유를 중단한 것처럼 인문학도 더이상 인간조건 자체에서 나오는 증상이나 간극 틈새에 대한 사유는 아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한에서 제도와 시장이 그걸 인공적으로 생명을 연장시키려 노력한다 해도 그건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요즘들어 굉장히 자주 속물들의 자기고백적인 글을 보곤 한다. 인문학을 고상하게 여기는 부류
들. 그들은 이젠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단지 상징가치와 고상함을 획득하기 위해 인문학을 본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은 당신들도 그렇지? 하고 은밀하게 동의까지 구하고 있다. 그런 글이 인기를 끌고 유행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를 증거하는 하나의 징후인 셈이다. 인문학은 그런 속물들에겐 삶에 덧붙이는 하나의 악세사리로 사치로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마치 그 사치와 악세사리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최후의 인문학적 제스츄어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미 대학 세미나의 뒷풀이는 바로 그런 의미 밖에는 없어졌다. 그들은 철학 뭐 있겠어? 하면서 자신들이 배우는 것에 대해 이미 냉소적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 문학 동호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속물들의 자기고백적 글은 도처에 있다. 어쩌면 그것은 솔직함이라는 미덕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럴거라고 성급하게 일반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인문학은 밥이나 잠이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삶의 일부분이다. 전혀 악세사리가 아닌 것이다. 그런 식의 속물의 고백과 동의를 구하는 식의 글들을 보다보면 언제나 나에겐 아무것도 고백할 것도 자백할 것도 동의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의 증상으로서의 인문학. 그게 모든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증상이 간극이 틈새가 사유를 강제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런 사람들에겐 속물의 자기고백과 동의를 구하는 식의 은밀한 미소는 그저 순수하게 구역질 밖에는 불러올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정확하게 이글의 맨 처음에 말했던 그 두가지 사이를 맴돌고 있다. 인문학 자체를 물신주의화 해서 고상한 것으로 항유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배부른 자의 사치로 짐짓 유물론적으로 깎아내린다. 리고 결국 자신들의 생활, 삶, 가족, 직장, 이런 것의 중요성을 내세운다. 이런게 아마 전형적인 물들의 자기고백 패턴일 것이다. (키치적 취향을 유물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옵션이다.) 그들은 군가의 삶, 생활, 가족, 직장, 그런 것들이 바로 인문학의 조건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혹은 망각하고있다. 혹은 그 둘을 허구적 이분법으로 분리시키고 있다. 인문학은 고상한 것도 아니고 배부른 사치도 아니다.(사실 이 두가지 관점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고상한 것이 곧 배부른 사치이니까 말이다.) 내가 보기에 저런 속물들에겐 인문학은 굳이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으니 사치가 되는 것이다. 고상한 교양이 되는 것이다. 악세사리나 상징가치를 부여하는 삶의 장식품이 되는 것이다. 저런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것. 속물들의 자기고백이 판을 치고 유행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위기의 가장 대표적인 징후인 것이다. 즉 인문학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사치이지 이미 필요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문학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사치가 된 거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잘못은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기정사실로 여기는 것이다. 아직은 인문학은 종언을 맞이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겐 사치가 아니라 삶과 생활과 가족과 직장과 모든 인간조건의 틈새와 간극과 증상에서 직접 길어져나오는 필요라는 것이다. 필요는 사치에 반대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필요없게 될때 그때 인문학은 위기를 넘어서 종언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도 속물들이 인문학을 장식품으로 사치로 악세사리로 이용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건 이미 그때가서는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일 것이다. 그때엔 이미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인문학을 필요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 필요를 사치로 환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제도든 시장이든 속물이든 무엇이든 간에 인문학을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사치로 여기는 것에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즉 삶과 사상, 삶과 철학을 따로국밥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젠가는 인간조건이 어떤 사유도 필요로 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을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시대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인문학을 내 삶에 있어서 여전히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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