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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단상

역사&문화/Meet with Cutlure

by 편집국장 2017. 12. 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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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을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으로 물신주의화하는 관념론자들, 그리고 배부른 사치로 여기는 유물론자들 둘은 동일한 족속이라는 것. 둘다 인문학은 고상한 거라는 허구적 정체성의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혹은 그것에 기반해 있다.

인문학을 제도화하고 거기에 대해서 시장의 분배를 정책적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를초래한 장본인들이다. 그들은 시장에 반대한다면서 동시에 시장의 분배를 그것도 인문학에 대한 특권적 분배를 기대한다. 얼마나 아이러닉한 일인가. (이것은 한국의 인디음악담론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은 삶의 증상이자 삶의 틈새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조건 안에서 곧바로 길어져오는 것이지 특정 제도들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직업이나 제도로서 사회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인문학을 배우는 것을 꺼려하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위기인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제도적, 시장적으로 엄청 호황을 누린다고 해도 그게 꼭 위기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람들이 세계를 자기자신을 타인을 삶을 더이상 사유하려 하지 않는다는, 그 근원적인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꼭 사유를 해야만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유는 삶에서 강제되는 것이다. 더이상 사유가 강제되지 않는다면 굳이 나서서 제도적으로 혹은 시장적으로 사유를 권장할 필요는 없다. 특히 교양화할 필요는 더 더욱 없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외쳤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인문학의 종언을 외쳐야 할지도 모른다. 언젠간 그런 때가 오게 될지도 모른다. 인문학이 삶의 증상이고 간극과 틈새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그런 간극과 틈새가 없는 세계에는 인문학 자체의 필요성도 없어지는 셈이다. 우리 시대가 그런 시대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이 항상 그런 틈새와 간극을 사유하는 것이라는 고진의 말은 인문학의 위기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즉 그런 틈새와 간극이 사라진 시대에는 인문학은 종언을 자연스럽게 맞이한다는 것이다. 

 즉 후역사적, 탈역사적, 포스트모던 시대인 지금 시대는 옛날에 가능했던 틈새와 간극의 사유로서
삶의 증상으로서의 인문학이 더이상 불가능해진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인 것이다. 인문학의 조건이 이미 와해된 것이다. 이 조건은 제도적, 시장적 조건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사유할만한 틈새와 간극 증상이 전부 사라져버린 것에 가깝다. 혹은 적어도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인문학이 항상 항구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이런 관점이 오히려 오류라면 어쩔 것인가. 인문학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인문학의 조건이 이미 와해되버린 시대가 지금이라면 어쩔 것인가. 제도와 시장에 대한 호소는 그 조건의 와해를 감추는 산소마스크라면 어쩔 것인가. 근대문학이 종언한 것처럼 인문학 전체가 종언한 거라면 어쩔 것인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은 있다. 문학이 시대와 세계에 대한 사유를 중단한 것처럼 인문학도 더이상 인간조건 자체에서 나오는 증상이나 간극 틈새에 대한 사유는 아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한에서 제도와 시장이 그걸 인공적으로 생명을 연장시키려 노력한다 해도 그건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요즘들어 굉장히 자주 속물들의 자기고백적인 글을 보곤 한다. 인문학을 고상하게 여기는 부류
들. 그들은 이젠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단지 상징가치와 고상함을 획득하기 위해 인문학을 본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은 당신들도 그렇지? 하고 은밀하게 동의까지 구하고 있다. 그런 글이 인기를 끌고 유행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를 증거하는 하나의 징후인 셈이다. 인문학은 그런 속물들에겐 삶에 덧붙이는 하나의 악세사리로 사치로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마치 그 사치와 악세사리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최후의 인문학적 제스츄어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미 대학 세미나의 뒷풀이는 바로 그런 의미 밖에는 없어졌다. 그들은 철학 뭐 있겠어? 하면서 자신들이 배우는 것에 대해 이미 냉소적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 문학 동호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속물들의 자기고백적 글은 도처에 있다. 어쩌면 그것은 솔직함이라는 미덕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럴거라고 성급하게 일반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인문학은 밥이나 잠이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삶의 일부분이다. 전혀 악세사리가 아닌 것이다. 그런 식의 속물의 고백과 동의를 구하는 식의 글들을 보다보면 언제나 나에겐 아무것도 고백할 것도 자백할 것도 동의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의 증상으로서의 인문학. 그게 모든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증상이 간극이 틈새가 사유를 강제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런 사람들에겐 속물의 자기고백과 동의를 구하는 식의 은밀한 미소는 그저 순수하게 구역질 밖에는 불러올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정확하게 이글의 맨 처음에 말했던 그 두가지 사이를 맴돌고 있다. 인문학 자체를 물신주의화 해서 고상한 것으로 항유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배부른 자의 사치로 짐짓 유물론적으로 깎아내린다. 리고 결국 자신들의 생활, 삶, 가족, 직장, 이런 것의 중요성을 내세운다. 이런게 아마 전형적인 물들의 자기고백 패턴일 것이다. (키치적 취향을 유물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옵션이다.) 그들은 군가의 삶, 생활, 가족, 직장, 그런 것들이 바로 인문학의 조건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혹은 망각하고있다. 혹은 그 둘을 허구적 이분법으로 분리시키고 있다. 인문학은 고상한 것도 아니고 배부른 사치도 아니다.(사실 이 두가지 관점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고상한 것이 곧 배부른 사치이니까 말이다.) 내가 보기에 저런 속물들에겐 인문학은 굳이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으니 사치가 되는 것이다. 고상한 교양이 되는 것이다. 악세사리나 상징가치를 부여하는 삶의 장식품이 되는 것이다. 저런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것. 속물들의 자기고백이 판을 치고 유행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위기의 가장 대표적인 징후인 것이다. 즉 인문학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사치이지 이미 필요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문학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사치가 된 거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잘못은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기정사실로 여기는 것이다. 아직은 인문학은 종언을 맞이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겐 사치가 아니라 삶과 생활과 가족과 직장과 모든 인간조건의 틈새와 간극과 증상에서 직접 길어져나오는 필요라는 것이다. 필요는 사치에 반대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필요없게 될때 그때 인문학은 위기를 넘어서 종언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도 속물들이 인문학을 장식품으로 사치로 악세사리로 이용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건 이미 그때가서는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일 것이다. 그때엔 이미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인문학을 필요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 필요를 사치로 환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제도든 시장이든 속물이든 무엇이든 간에 인문학을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사치로 여기는 것에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즉 삶과 사상, 삶과 철학을 따로국밥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젠가는 인간조건이 어떤 사유도 필요로 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을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시대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인문학을 내 삶에 있어서 여전히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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