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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리더십의 비밀?

역사&문화/Talk to History

by 편집국장 2017. 2. 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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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에서 시작하여 서유럽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서아시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타파하고 제정으로 전환하는 기틀을 마련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카이사르는 로마제국의 기초공사를 위한 청사진을 만들었고, 그 설계를 토대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건물을 지어 준공을 하였다. 


로마인이야기는 인류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대국으로 존속하고 유지된 로마의 역사를 11권의 책 속에 담아내고 있다. 로마인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상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이사르가 로마제국의 창업자라면 아우구스투스는 수성에 성공하여 제국이 장기간 동안 존속할 수 있도록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기업의 성장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관찰이 가능하다. “창업은 쉬워도 수성이 어렵다”고 흔히들 말한다. 로마제국의 창업과 수성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최근의 경영이론과 비교하면서 지난 호에 살펴본 카이사르의 리더십에 이어 아우구스투스의 리더십을 조명해 본다.

기원 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18세로서 정치권에서는 애숭이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그가 당대의 쟁쟁한 실력자인 안토니우스를 제압하고 14년 만에 최고권력자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지혜와 능력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그의 리더십 특성은 첫째, 철저한 목표관리를 실시한 점을 들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폐지와 제정의 구축’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워 목표를 달성했다. 특히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원인을 분석하고 기득권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뜻을 달성하기 위해 늘 마스터 플랜을 마련하여 일을 추진했다. 예를 들면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에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하여 원로원을 안심시키고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결과는 공화정은 폐지되고 제정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가 하는 일은 하나 하나는 합법적이지만 서로 연결하면 비합법이 되는 제정으로 연결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생했을 때의 예상되는 이점을 그려본 후 치밀하게 장애요인을 살펴봄으로써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투스는 오늘날의 MBO(management by objective)개념을 도입하여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목표를 이룬 황제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제국 통치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카이사르는 로마가 제국으로 가기 위한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설계를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완성이었다. 이를 이어 받은 아우구스투스는 사람의 자의성을 방지하기 위해 가능하면 무슨 일이든 제도화함으로써 행정이 합리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하였다.

상비군제 도입, 원로원 의원수의 구조조정, 화폐개혁, 국세청 창설, 선거제도 개혁 등을 통해 제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였다. 특히 당시에 50만에 달하는 군인을 구조조정하여 16만 8천 명으로 감축한 후 상비군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군대를 양적관리에서 질전관리로 전화하였고, 이를 위해 퇴직금 제도를 법제화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에 금할 수 없다.

셋째, 시스템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를 통해 점진적인 개혁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기간 동안에 경험한 로마제국의 평화는 그의 수많은 개혁이 처음부터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개혁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그가 쉬지 않고 감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가 도로를 건설하고 유지와 보수를 지속적으로 하였듯이 개혁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계획(Plan)과 실천(Do)과 평가(See)의 선순환을 끊임없이 체계화하였기에 시스템의 작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넷째, 솔선수범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의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이 투철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솔선수범하는 자세였다고 한다. 그는 재임 중에 국가가 어렵거나 돈이 필요할 때 개인 돈으로 국고를 네 번이나 지원했다. 돈이 모자라면 먼저 자기 주머니를 턴 후에 모금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딸 율리아를 자손들을 번성시킬 목적으로 세 번씩이나 결혼시킬 정도로 혈연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가족이나 친척이 법을 어기면 엄격하게 처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딸과 친척들이 유배형을 받고 쓸쓸하게 노년을 보냈고,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에서도 유배된 딸과 손녀는 영묘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적은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강한 책임감과 더불어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구분하는 솔선수범이 몸에 벤 지도자였다.

다섯째, 권한 위임을 생활화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를 활용함으로써 권한을 위임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예를 들면 군사와 내정은 아그리파, 외교와 문화는 마이케나스에게 위임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아그리파는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의 군사적인 분야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추천한 인물로서 모든 군사전략과 지휘는 그가 맡았다. 마이케나스는 외교와 문화 분야에서 충실한 조언을 하여 원활한 통치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요즈음 기업인들이 문화사업 육성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하는 매세나 운동이 바로 마이케나스의 뜻을 기리기 위한데서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도 권한위임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끝으로 놀라운 자제력을 보여 주었다.
인류 역사상 각종 개혁이 실패하는 이유는 서두르는 데 중요한 원인이 있다. 기득권층의 반발이 계속될 경우 개혁을 추진하면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아우구스투스가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비난과 불편함도 참고 견디면서 오로지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갔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신중한 성격을 타고난 아우구스투스가 뛰어난 자제력을 발휘했던 게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 의원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의붓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 그의 자제력을 엿볼 수 있다.

“나의 티베리우스여, 젊은 너로서는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분개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지 않겠느냐.”

개혁이란 미명하에 목청만 높이는 개혁은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준비된 개혁, 말 하지 않는 개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우구스투스는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카이사르는 창업형 리더십, 아우구스투스는 수성형 리더십을 발휘하여 로마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사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절묘한 보완관계에 있다. 성장과 안정, 창업과 수성, 진보와 보수의 조화를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리더십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리더십이 오늘날 지식 정보사회에서 더욱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로마제국의 초석을 닦은 두 지도자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벤치마킹이 무한경쟁시대의 높은 파고를 뛰어넘는데 좋은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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