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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 샤를마뉴

역사&문화/Talk to History

by 편집국장 2017. 2. 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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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생애

 샤를마뉴는 샤를1세(Charle Ⅰ), 카알 대제(Karl der Grosse),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등으로도 불린다. 그는 742년경 4월 2일 피핀 3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프랑크 왕국의 권력은 궁재(宮宰)에게로 집중되었으며 샤를마뉴가 태어날 무렵엔 그의 아버지 피핀과 숙부 카를로만이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어 프랑크 왕국을 장악한 직후였다. 나중에 카롤링거 왕조라고 부르게 된 이 가문은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직을 세습하며 프랑크 왕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왔다.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분열 직전에 처한 왕국을 재건했고 732년에는 투르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사라센(이슬람)을 물리쳐 유럽과 기독교 세계를 지켜낸 공로로 인망이 있었다. 그는 힘없는 메로빙거 왕조가 유일하게 갖고 있던 이름뿐인 국왕의 대권을 침해하지 않은 채 사실상 왕국을 아들인 피핀과 카를로만에게 세습하듯 물려주었다.

 샤를마뉴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 피핀은 왕족 및 자신의 형제들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751년에는 힘 있는 자가 국왕이 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교황 자카리아스로부터 승인을 받아 실권 없는 메로빙거 왕가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킨 뒤 프랑크 회의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자카리아스의 후임 교황인 스테파누스 2세는 롬바르드족(랑고바르드)의 침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는 데 도움을 청하려고 754년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12세였던 샤를마뉴는 왕국의 장자로서 교황을 영접했다. 교황은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유식(聖油式)을 집전해 피핀과 그의 두 아들 샤를마뉴 및 카를로만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 귀중한 봉사의 대가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교황의 영지에서 축출할 것을 다짐했다. 피핀은 760년부터 해마다 원정을 해 아키텐(루아르 강 남쪽의 프랑스)을 정복함으로써 피레네 산맥까지가 모두 프랑크 왕국의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이 일련의 원정에는 샤를마뉴가 늘 동행했다.

 이런 젊은 시절의 경험은 아마 샤를마뉴의 성격과 목표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권력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외적에 대항해 단호하게 싸우고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넓히려는 경향, 가까운 친척들의 권리를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결심도 아버지와 똑같았다. 샤를마뉴는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일찍부터 인정했다. 그는 교회를 존중했고 크리스트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왕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또 교회에 대한 왕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도 신이 그에게 크리스트교도들을 맡겼기 때문에 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크의 왕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샤를마뉴의 동생 카를로만은 부르군트 일대를 다스렸는데 롬바르드 선왕의 왕비였던 게르베르가와 결혼하였다. 롬바르드 왕 데시다리우스는 카를로만이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기를 원하여 그를 암암리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동생과의 갈등에서 샤를마뉴는 승리했고 771년 카를로만이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의 단일 지배자가 되었으며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샤를마뉴는 이교도인 작센족이 라인 강 하류 지역을 공격한 앙갚음으로 772년에 지금의 니더작센 지방과 베스트팔렌 지방에 사는 작센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775년부터는 복수보다는 작센족 전체를 정복하여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프랑크 왕국에 통합하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이 목표는 여러 차례의 원정 끝에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작센족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775~777년에 대규모 세례식이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777년에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작센족의 항복을 조인했다. 의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샤를마뉴의 도움을 얻으려고 스페인 북부에서 찾아온 아랍인들도 끼어 있었다. 778년 여름 샤를마뉴는 스페인으로 진격해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그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퇴각하던 프랑크 군대는 바스크족의 공격을 받고 참패를 당했다. 브르타뉴 원정 때 활약했던 샤를마뉴의 기사 롤랑도 이때 죽었는데 그는 나중에 전설과 시(롤랑의 노래)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토 보전에 힘쓰는 한편 내정을 강화하고 문화생활과 법의 지배를 보호했다. 샤를마뉴가 스페인에서 패배한 직후 작센족이 다시 봉기했다. 샤를마뉴가 생각하기에 세례를 받고 충성을 서약한 이 작센족의 저항은 정치적 배신이자 종교적 변절로 이런 범죄에는 가혹한 처벌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샤를마뉴는 작센족과 18회나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야 그들을 완전히 정복했다. 결국 그는 작센족을 자신의 지배 아래 복종시키겠다는 목표만이 아니라 제국에 완전히 통합시키겠다는 목표도 달성했다. 세속 권력과 크리스트교 신앙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은 작센족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샤를마뉴는 781년에 2번째로 로마를 방문해 교황이 어린 두 아들 피피노와 루이(루트비히)에게 각각 롬바르드와 아키텐의 왕관을 씌워주게 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의 황태후이며 콘스탄티누스 6세의 모후로서 섭정을 맡고 있던 이레네에게서 자신의 이탈리아 지배를 사실상 승인받았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787년에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한 뒤 샤를마뉴와 비잔틴 제국의 협약은 깨졌다.

 788년 샤를마뉴는 바이에른 공작이자 사촌인 타실로 3세를 폐위함으로써 라인 강 건너편에 남아 있는 마지막 게르만족의 독립성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제 서게르만족인 알라마니족, 바이에른족, 작센족, 튀링겐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 단위 안에 모이게 되었다. 게다가 아바르 왕국(지금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에 속해 있던 나머지 공국들과 도나우 강 유역에 새로 건설된 슬라브족 국가들도 느슨하나마 프랑크 왕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프랑크 왕국은 엄청난 팽창을 통해 중세 초기의 부족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지위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는 양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인 변화도 필요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은 늦게야 떠올랐고 그나마도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까지 포함한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비잔틴 제국은 로마와 라벤나를 포기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에 대해서만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보호를 받고 있던 교황 하드리아누스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치령을 세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서로마의 황제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가 옛날 로마 제국의 서부지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황제 지위에 대한 합법성을 구체화해주었지만 동로마 황태후 이레네(797년 아들을 퇴위시키고 장님으로 만들었음), 즉 여성의 지배에 대항하려는 욕망도 그가 제위를 얻으려고 한 이유였다.

 비잔틴 제국은 제위 찬탈자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샤를마뉴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새로운 지위와 협상에서 얻은 로마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뿐이었다. 812년 비잔틴 제국 황제인 미카일 1세가 어쨌든 샤를마뉴를 황제로(로마 황제는 아니었음) 승인함으로써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황제라는 칭호는 샤를마뉴에게 어떠한 권력도 추가로 주지 않았지만 그의 로마 지배는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754년의 사건, 즉 교황이 비잔틴 제국과 소원해지고 그 대신 프랑크 왕국과 친교 관계를 확립한 것은 이제 명백해졌다. 중세의 제국이라는 개념, 그리고 프랑크 왕국 및 그 뒤를 이은 신성 로마 제국의 법률적 전통이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고대 로마 제국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샤를마뉴가 가졌던 황제라는 칭호와 지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궁정과 행정

 제국의 창건은 주로 제국 내부의 문화 수준을 높이려는 샤를마뉴의 노력을 통해 합법화되었다. 샤를마뉴가 권력을 잡았을 때 프랑크 왕국의 문화, 행정, 사법 제도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이 프랑크 왕국의 왕은 일정한 주거지가 전혀 없었다. 따뜻한 봄 날씨 때문에 샤를마뉴가 특히 좋아한 아헨이 왕의 거처가 된 것은 794년에 이르러서였다. 샤를마뉴는 이곳에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지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제국 전역의 종교의식과 도덕성 및 재판절차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모든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적 운동은 제국의 수많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최고의 지성들을 불러들여 성직자를 가르치게 하고 결국에는 백성 전체를 가르치게 한 샤를마뉴의 노력과 그의 궁정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운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궁정의 신학적 지식과 지적 자부심은 791년경에 샤를마뉴의 이름으로 작성한 포괄적 논문인 <샤를마뉴의 책 (Libri Carolini)>에 반영되어 있다.

 샤를마뉴는 이 궁정을 통해 제국을 다스리고 관리했으며 정의를 시행했다. 궁정과 제국 각지의 주요행정관 및 귀족들은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씩 프랑크 왕국의 심장부나 정복한 영토에 모여 총회를 열었다. 이것은 군대회의나 귀족들의 입법회의 및 교회의 종교회의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은 카롤링거 제국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들과 궁정의 관계는 샤를마뉴의 명령에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는 왕의 사절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왕의 사절은 대개 2명이 한 조를 이루었는데 관리와 고위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명령은 글로 쓰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기 20년 전부터 왕의 포고령이 약간 애매하나마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의 포고령이 일정한 틀을 갖는 데는 시간이 걸렸으며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에 형식이 고안되었다. 샤를마뉴는 그가 지배하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전통적 권리를 원칙적으로 존중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그 전통적 권리를 기록하게 했다. 프랑크 왕국의 법령집은 여러 부족의 율법을 보완하는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공공생활과 개인생활의 가장 다양한 측면에 적용된 규칙이며 왕의 사절과 백작 및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내려진 특수한 명령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샤를마뉴 시대에 만들어진 법률 문서는 샤를마뉴가 사법 행정과 대중 계몽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준다.

 
통치의 한계

 그러나 샤를마뉴의 제국에 구조적인 결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 제국의 모든 정치제도는 샤를마뉴의 뛰어난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샤를마뉴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1세 때 프랑크 제국의 양상을 보면 훨씬 명확하다. 샤를마뉴의 교육정책으로 자신감을 얻은 성직자들은 항상 샤를마뉴의 신권(神權)정치를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교육적 원칙을 내세워 샤를마뉴의 신권정치에 반대하곤 했다.

 카롤링거 왕조와 함께 제국을 건설한 평신도 귀족들은 새로운 정복이 새로운 이권과 봉토를 약속해주지 않는 한 왕조와 확고한 유대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러나 800년에 이르자 이미 도달한 국경선을 넘어 밖으로 더욱 팽창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다. 실제로는 이미 얻은 땅을 통합, 관리하며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과 기술적 수단도 불충분한 상태였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사용한 수단들(화폐 경제, 봉급을 받는 관리, 상비군, 정비된 도로망과 통신망, 해안을 지키는 해군)을 갖고 있지 않았다. 샤를마뉴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해안은 노르만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806년에 샤를마뉴는 제국을 분할해 아들들한테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지만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자 813년 아헨에서 아키텐의 루이(경건왕 루트비히)를 공동 황제로 만들고 유일한 후계자로 삼았다. 샤를마뉴는 불과 몇 달 뒤인 814년 1월 28일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간성과 영향력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손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크리스트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는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그의 제국은 2대 황제인 루트비히에서 끝났지만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갈기갈기 찢어졌던 서유럽 사람들이 그 후 몇 세기 동안 의지할 수 있는 공통된 지적, 종교적, 정치적 유산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물론 이런 유산이 샤를마뉴 혼자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없었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궁정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이라고 불렀다. 사실 중세의 수백년 동안 유럽 역사에 그와 비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국의 분열

 샤를마뉴가 814년에 죽자 그의 아들 루이트비히 1세가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워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경건왕이라는 별칭도 얻었지만 난세를 헤쳐 나갈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무능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제국 분열의 조짐은 루트비히 1세의 황후 에르멘가르드가 세 아들을 남기고 818년에 세상을 떠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루트비히는 게르만족의 상속 유풍에 따라 제국을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하기로 정해 놓았다. 장자 로타르 1세에게는 제위를 물려주어 제국의 중심부를, 차남 피핀과 삼남 루이 2세에게는 변경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에르멘가르드가 죽고 4개월 후 루트비히는 유디트와 재혼하여 사남 샤를(대머리 왕 샤를 2세)을 낳았고 그에게도 상속권이 생겼다. 그것도 늦게 얻은 귀여운 자식이고 형들에 비해서 어린 연령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친으로서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상속 문제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루트비히는 829년에 회의를 소집하고 샤를에게 제국의 중심부를 준다고 선언해 버렸다.

 여기서부터 부자간 혹은 형제간에 추잡한 상속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타르는 아우 피핀과 일부 호족들의 호응을 얻어 반란을 일으켜 황후 유디트를 감금하고 로타르의 측근들이 궁중의 요직을 차지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나 6개월 후 다시 루트비히가 일부 호족과 교회, 수도원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었고 이에 불리함을 느낀 장자 로타르는 교황청과 말을 맞추어 놓고 알자스에서 회의를 열어 아버지인 루트비히를 퇴위시키고 세 아들은 유디트의 아들 샤를을 배제하고 합의하에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이 합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우 1년을 못 넘기고 형제들 간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차남 피핀이 부친 루트비히와 손을 잡고 로타르에게 대항하였다. 호족들은 우왕좌왕하였고 교회는 에르멘가르드의 아들들을 외면하였으며 수도원이 확실하게 루트비히를 지지하자 로타르는 이탈리아로 도망갔고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루트비히는 834년에 복위하였다.

 그 후 몇 년간 잠잠하였지만 차남 피핀이 죽자 부왕 루트비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땅을 샤를에게 주었고 840년에 루트비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상속 분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843년에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을 삼분하여 로타르는 제호(帝號)와 중심부를, 삼남 루이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를, 샤를은 제국 서쪽의 서프랑크를 차지하였다. 이래서 제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로 분할되었고 855년에 로타르가 죽고 세력이 약해지자 동프랑크의 루이와 서프랑크의 샤를이 870년에 메르센에서 다시 조약을 맺어 중프랑크의 로트링겐 일대를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세 나라의 출발이었고 그 판도도 지금과 비슷하였다.

 샤를 대제의 손자들은 이렇게 해서 영토를 얻었지만 그것은 오래갈 수는 없었고 결국 875년에 중프랑크에서, 이어 911년에 동프랑크에서, 987년에는 서프랑크에서 카롤링거의 왕통은 단절되었고 노르만인과 마자르인 그리고 이슬람인의 침입으로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자료 출처
http://mtcha.com.ne.kr/world-man/france/man32-syarulmanyu.htm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8304

http://www.nobelmann.com/history/history_.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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