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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러시아 공사관 답사와 아관파천

역사&문화/Talk to History

by 편집국장 2009. 7. 30.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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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아관파천(俄館播遷)'.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이 네 음절의 짧은 단어.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황실과 민중 일반이 느끼는 압력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 대한제국의 지도자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황급히 몸을 피하게 되는데 바로 그 사건이 아관파천이요, 바로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건물이 바로 러시아 공사관의 일부인 것이다.

 비록 첨탑 부분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지긴 했지만 이 건물은 운현궁이나 경운궁, 지금은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 등과 함께 우리 근대사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건물인 것이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세력의 배경으로 조직된 제3차 김홍집(金弘集)내각은 일세일원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군제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살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 세력은 친위대(親衛隊)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분산될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만회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희망에 따라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의, 파천계획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미리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50명과 포(砲) 1문을 서울로 이동하고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밀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김홍집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등의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捕殺) 명령을 내려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魚允中)은 군중에게 타살되고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친일내각은 몰락하고 박정양(朴定陽:首相 ·內相) ·이완용(外相 ·學相 ·農相) ·이윤용(李允用:軍相) ·윤용선(尹容善:度支相) ·이범진(法相 ·警務使) 등의 친러파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중심인물은 이범진이었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에 힘쓰고, 일본세력으로 개혁하였던 제도를 구제(舊制)로 환원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 ·공포의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一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 ·종성(鐘城)의 채광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沔炭所)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관파천 1년 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士官)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가 구입되어 중앙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운궁(慶運宮: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중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하였다.

구러시아 공사관의 유래



 구 러시아공사관의 정확한 명칭은 러시아공사관 탑이다. 러시아공사관 건물의 일부인 탑에 해당한다.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한러수호조약[韓露修好條約]이 체결된 1885년에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경복궁과 경운궁(덕수궁) 등 서울 4대문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정동(貞洞)의 고지대에 입지했으며, 그 건물 규모나 대지 규모에서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독일공사관보다 컸다.

 19세기 말 고종은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양 세력을 이용하려 하였는데, 이 서양 국가 중에 러시아를 특히 중시했다. 러시아공사관은 경운궁과 미국ㆍ 영국 등 서양 국가의 공관 등이 집중적으로 위치한 정동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자리는 원래 경운궁의 영역이었으며, 탑의 동북쪽 지하실이 경운궁으로 연결되었다고도 한다.

 1895년 고종 비인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 세력에 의하여 시해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俄館播遷],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조직되었다. 이렇게 러시아공사관의 입지와 건축은 조선 말의 정치적인 상황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러시아인 사바찐(Afanasij Ivanobich Seredin Sabatin)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60년경 러시아에서 출생했다. 1883년 여름 중국 상해에 있던 사바찐은 고종으로부터 유럽식 정주지(定住地)의 설계와 관청 건물의 건축을 맡아달라고 초빙받는다. 그는 그해 9월 조선에 도착했고, 1884년 초에 왕궁 축조 설계, 저렴한 벽돌공장, 불연성(不燃性)의 이엉지붕 설비안, 서울의 전차선로 설비안 등을 작성했다. 그의 건축활동은 경운궁ㆍ정동 일대ㆍ서대문ㆍ경복궁 그리고 인천 등지에서 이루어졌는데, 그의 첫 설계 작품은 러시아공사관 건물과 그 건물의 러시아아치문[俄門]이다.

 그는 또한 명성황후 민씨 시해사건의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는 왕실직속 시위대(侍衛隊) 교관이던 미 육군 퇴역소장 다이(W. M. Dye)와 함께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옥호루(玉壺樓) 인근의 서양관(西洋館)에 기거했는데, 이 건물은 고종의 거실에서 불과 60~70m 떨어진 곳이었다. 시해의 주동자들인 일본군 장교들은 황후 처소를 사바찐에게 물었는데 그가 가르쳐주지 않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었다고 한다.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사진에 의해서 그 규모와 건축을 알 수 있다. 사진 자료에 의하면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단층 ㄱ자형이었다. 정면과 측면은 아치 아케이드(arcade)로 둘러쌓았고, 정면에는 페디먼트(pediment)를 두었다. 이 공사관의 핵심은 탑부이다. 고지대에 3층탑을 설치하여 경복궁과 인접한 경운궁 그리고 주변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 탑은 석재와 회색 벽돌로 되어 있었는데, 1973년 탑 외부 단장 때 흰 회반죽 칠로 마감하였다. 1층은 반원형 아치의 아래로 긴 장방형 개구부가 있으며, 2층은 단순 벽으로, 3층의 각 입면은 쌍 반원형 아치창과 페디먼트로 구성되었다. 이 3층은 전망대 역할을 했다.

 1896년 촬영한 사진을 보면, 러시아공사관 입구에는 개선문 형식의 아치문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 문은 벽돌조로 전후 좌우 4면이 아치로 개방되었다.

 서울특별시는 1981년 문화재관리국과 공동으로 공사관 유적을 발굴하였는데, 공사관 지하에는 밀실과 비밀통로가 있었다. 지하 밀실은 7m×4m의 장방형 평면으로 돌과 벽돌로 쌓여져 있었다. 이 지하 밀실과 공사관, 그리고 탑은 비밀통로로 서로 연결되었는데 그 통로 폭은 약 45cm로 매우 좁고, 길이는 20.3m였다. 통로의 중간 지점에 폭 50cm, 길이 5m를 확장시켜 놓았는데, 이는 왕복 통행 때 대기 공간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통로의 벽은 벽돌로, 바닥은 재래식 석회다짐을 했다.

 고종은 아관파천 때 이 공사관의 제일 좋은 방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커튼ㆍ벽지ㆍ바닥재ㆍ실내등은 모두 화려한 것이었고, 침대ㆍ소파ㆍ의자 등도 제정(帝政) 러시아로부터 수입된 가구들이었다고 한다. 이 공사관 내부의 장식은 제정러시아의 화려한 인테리어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광복 직후 소련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소실되고 탑 부분과 일부 지하층만 남아있었다. 1973년 약간 손질하여 현재와 같이 되었다. 이 건물은 건축사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역사적인 장소성(場所性)이 더 중요하다. 이 탑은 이를 상징하고 있다. 1981년 10월 건물을 재보수하고 주변을 조경하여 시민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대지 면적은 약 2,500평으로 반 이상 줄었다. 이 건물은 197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3호로 승격되었다.


느낀 점

 당시 대한제국은 말 그대로 국가로서의 체면을 상실한 채 그저 일본이나 러시아, 영국 등 열강들에게 휘둘리던 동방의 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러일전쟁에서 '만약' 러시아가 승리하고 일본이 패했다면 과연 고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을까?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느니 차라리 해외 망명을 해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지원했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물론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서의 '가정(假定)'이란 그저 허무맹랑한 '희망'일 수밖에 없으며 무용지물에 그친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선땅에서 동분서주하던 열강들에게 있어, 동방의 한 작은 나라의 왕 고종은 그저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었을 뿐이며, 고종 자신이 의탁처로 택한 러시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어쩌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후 약 1년 뒤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것은, 한반도 역사에 있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저 나라 잃은 자의 슬픔이요 힘없는 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 언젠가는 양상은 달리 해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테니 말이다.

 또한 고종 스스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했다기보다는 자신을 비롯한 왕가의 안녕을 위해 애쓴 흔적이 더 역력하니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이를 두고 너무 무책임한 소리일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오해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물론이다. 이 길손이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아마도 가슴 한구석을 메어오는 답답함은 여기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고종을 미워하고 싶어도 이런 비극의 원인을 고종 스스로가 초래했다고 단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차라리 고종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있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래, 그냥 마음 편하게 지나간 '과거'는 잊는다고 치자. 문제는 어디까지나 '현재'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도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관파천이라는 한맺힌 설움을 경험한 지 100년도 더 지난 현재 2009년의 한국은 외부로부터 자유로운지 쉽사리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 보인다. 주변 4강을 만족시켜야 하는 남북통일을 위한 잰걸음들이, 미국 시장(市場)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한국 경제가 그저 답답하기만한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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