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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 천년의 역사와 만나다

역사&문화/Talk to History

by 편집국장 2017. 2. 1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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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은 쇠퇴하여 395년에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어버립니다. 그 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대이동에 의해 멸망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천년동안 명맥을 이어 나갑니다. 이 반쪽짜리 로마제국은 앞의 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비잔틴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비잔틴 제국의 발전과 쇠퇴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산천이 수백 번도 넘게 변할 만큼의 긴 시간을 유지한 나라라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겠죠? 우선 비잔틴 제국은 아시아와 유럽을 갈라놓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잔틴 제국이 정치적으로 쇠퇴한 이후에도 여젆시 콘스탄티노플은 경제의 중심지 자리를지킬 수 있었죠. 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 로마 시대부터 건설된 성벽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이민족들이 쉽게 침범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비잔틴의 황제는 황제 교황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의 지도자 뿐아니라 교회의 수장까지 겸하고 있었으므로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답니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누립니다. 527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스티니아누스는 백 년전에 멸망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로마의 재건을 위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비잔틴 제국 내부를 안정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는 국내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을 명확히 알려주는 법체계를 다지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법전 편찬에 가장 먼저 매달리지요. 이 때 만들어진 로마법 대전은 기존의 로마법을 집대성하여 만든 것으로 그 뒤 유럽 각국의 법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또한 유스티나아누스 대제는 양잠법을 몰래 페르시아에서 들여와 견직 공업이 발달하는데 빛나는 공을 세우기도 해요.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해외로 눈을 돌립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정복 사업으로 비잔틴 제국은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 아프리카의 옛 로마영역을 차지했고, 로마 제국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반도도 반쯤 되찾아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사후, 비잔틴 제국은 롬바르드 족의 침입을 시작으로 북쪽의 슬라브 족,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침공에 시달립니다. 따라서 후대 황제들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모든 영토를 31개의 군관구로 나누고 황제가 직접 임명한 사령관에게 군사관, 행정권, 사법권을 주는 군관구제와 농민에게 군역에 종사하는 대가로 토지를 주는 둔전병제를 시행합니다. 그러나 7세기에 강성해진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비잔틴 제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있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의 남부로 영토가 축소됩니다. 이후 9세기에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 제국이 분열된 틈을 타 영토를 회복하고 다시 번성하는 듯 했지만, 군관구를 장악한 지방 세력가들이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차지하는 바람에 강력했던 황제권을 잃어버리면서 다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겨우 명맥만 이어가던 비잔틴 제국은 베네치아 상인의 사주를 받은 제4차 십자군 원정군의 침입으로 더욱 약해져, 결국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 군에게 정복당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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