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6.25 한국 전쟁의 발생 배경은?

역사&문화/Talk to History

by 편집국장 2009. 6. 29. 10:13

본문

 

 “한국전쟁”이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을 말한다. ‘6·25 사변’ 또는 ‘6·25동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韓國戰爭 Korean War: 일부에서는 Korean Civil War라고 주장하기도 함)”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행위가 계속되었다.


  한반도에서의 분단정부의 수립은 김구의 예언처럼 동족상잔의 비극을 잉태한 것이었다. 분단정부 수립에서부터 이미 한반도는 내전적 상황에 처해 있었고, 1948년 2월 7일의 남로당주도의 이른바 2.7 구국투쟁에서부터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의 발발까지 무려 10만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38선에서도 연대급 이상의 병력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남한의 이승만은 무력증강과 전쟁에 대비한 준비도 없이 ‘북진통일’을 주장하였고, 북한의 김일성도 〈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 회의〉 석상에서 ‘국토완정(國土完整)’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였다. 이에 김일성은 1949년 3월의 모스크바 방문과 1950년 3월의 비밀 방문 등을 통해 전쟁준비를 진행하였으며, 공산화된 중국과도 긴밀히 협의하였다. 김일성은 1950년 모택동과  비밀회담을 갖고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한 중국은 공산화 이후 공산혁명을 위해 참전했던 조선족 부대 약 2만 여명을 북한으로 보내주었다.

  이처럼 전쟁을 위한 무력증강에 힘쓰던 북한은 드디어 1950년 3월에 스탈린의 최종 승인과 5월에 모택동의 동의를 통해 전쟁을 개시할 결정적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은 전쟁의 개시 이전인 1950년 1월에 발표된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의 ‘한국은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요지의 발언은 북한의 도발을 자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북한의 김일성과·스탈린·모택동은 중국 혁명의 성공, 애치슨 선언, 그리고 남한에서의 사태 전개(유격대 투쟁과 남조선 인민 봉기의 예상)등으로 전쟁의 조건이 성숙하게 되자 1950년 6월에 전쟁을 개시하였다.

※ 국가기록원에서 제공받은 글로 내용이 The Neo Renaissance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