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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 History/Talk to History (62)
조선시대의 노무현, 그리고 이명박
조선시대 성군을 꼽으라면 대부분 조선 초기 문화와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전성시대를 꽃피게 한 세종과 조선후기 합리적 문화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의문의 죽음으로 사라져간 정조 그리고 효심이 깊고, 타고난 재능과 능력을 갖췄으나 역시 일찍 생을 마감한 인종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요즘 말로 하면 막장, 그 시대의 최악의 임금을 꼽자면,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 폭군으로 변한 연산군, 조선 최악의 전란에 아무런 준비도 못 하고 있다가 전란이 일어나자 궁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으며 그런 전쟁을 이겨낸 장수와 흉흉한 민심을 수습한 세자를 오히려 의심하고 견제한 선조, 그리고 스스로 반정을 일으켜서 왕이 된 후 삼전도의 치욕을 맞이한 인조가 대표적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것, 기록자의 것이기 때문에 인조 재위 이후 역사 속에서 광해군은 연산군과  동급의 패륜을 저지른 조선 최악의 군왕으로 기록되고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박정희, 이명박을 비판하고 외면하는 것이 자기 부정이기에 군부 독재정권을 포장하고 미화시키는 것 같이 인조와 인조 이후의 왕들로서는 정통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더구나 조선은 성리학을 기초로 한 명분을 중시하는 왕조)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 인조를 미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듯이 광해군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시절이 길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긍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음) 400여 년 전 광해군과 인조, 그들은 지금의 노무현과 이명박과 너무 닮아있습니다.
 

광해군, 전란으로 파탄 난 나라를 물려받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도망간 임금과 문무백관 그리고 사대부들에 대한 백성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탄 궁궐은 왜군이 아닌 백성이 불 지른 것이었고, 피난 중인 선조에게 비난하고 심지어는 돌을 던지는 경우까지 비일비재할 정도로 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이런 혼란의 시대에 세자로 책봉되어 맹산, 곡산, 이천 등지를 순회하면서 왜군을 교란시키고 백성을 위무하며 왕이 해야 할 일을 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광해군은 적자(왕의 정비 소생)가 아닌 후궁의 소생이었습니다. 정비의 소생이 없던 선조가 즉위 말년시절 51살 되던 해 19살의 정비를 맞이했는데, 그녀가 인목왕후였습니다. 그리고 그 인목왕후로부터 적자가 태어났는데 바로 영창대군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잘 수습하고 나가고 있었음에도, 대신들의 흔들기와 선조의 우유부단함 등으로 인해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결국 선조의 승하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조의 광해군 폐위 이유 중의 하나인 형제들을 죽이고 대비를 폐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아직 국난으로 나라가 혼란스럽고 자신은 적자가 아닌 상태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되었는데, 분명 동복형제와 이복형제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광해군은 신하들의 주청을 극구 반대했다고 하지만 결국엔) 잘못이긴 하지만, 조선 초기 태종과 그리고 세종의 아들 세조도 이복형제와 동복형제를 제거한 후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오히려 훌륭한 왕으로 추존받고 있음을 볼 때 억울한 측면도 강합니다. 더구나 영조의 경우엔 친아들 적자인 사도세자를, 인조의 경우도 친아들 적자인 소현세자에 대한 독살 가능성이라는 큰 패륜을 저지른 것을 봤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한 것으로 패륜아로 낙인찍혔지만, 계대비인 정순왕후와의 갈등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정조나 조선 최악의 왕비로 꼽히는 문정왕후를 계비로 두고 마찬가지로 독살설로 세상을 떠난, 살았으면 조선의 또 하나의 성군으로 기록되었을 인종을 생각한다면 계비를 두고 정치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했을지는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인조반정과 그 이후 인목대비의 행동을 본다면)

 오히려 광해군 시절 민심은 광해군으로 향해 있었고 폐비 사건은 궁중에서 자주 일어났던 왕비나 세자빈의 폐비 사건 정도로 여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노무현도 만만치 않은 어려움에서 집권하게 됩니다. 물론 IMF라는 큰 산은 김대중 정부에서 끝냈지만 그것을 끝내기 위한 경기부양책이었던 카드남발로 인한 신용대란, 부시의 집권과 이라크 전쟁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상황을 통한 유가상승과 북한과 미국 간의 알력다툼 등 어려운 상황에서 집권하게 됩니다.

 세금의 개혁, 국가재정의 확보

 왜란으로 파탄 난 경제살리기와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광해군은 혁신적인 조세개혁인 대동법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는 백성에게 압박으로 다가온 공납제도의 개혁으로 조세정의를 위한 개혁이었으며 양반 지주층의 반발을 몰고 옵니다.

 또한 조세를 정확히 조사하기 위해서 양전사업(토지조사사업)을 하게 됩니다. 즉, 누가 어디에 얼마의 땅을 가지고 있는지 조사하여 세금을 매기는 것으로, 원칙적으로는 20년에 한 번씩 시행되어야 할 제도였으나 조선왕조 통틀어 4번 정도밖에 시행되지 않은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가 시행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양안을 기록하여 각 관청에 두게 되는데, 지금도 있는 자들이 더 세금을 안 내려는 것처럼 당시도 사대부들은 자신의 이름을 빼버리고 나라에서 주는 녹만 타 먹고 세금은 내지 않아 백성만 세금을 내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양전사업과 대동법 시행으로 광해군은 백성의 민심을 잡게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기득권들의 거센 반발을 받으면서 종부세(종합부동산세) 등의 세금변화와 여당의 삽질과 야당의 반대로 누더기가 되었지만 4대 개혁법안(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등으로 대표되는 개혁적 정책 등을 실시하거나 시도하였습니다.

 한편, 광해군은 국가의 위신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란으로 소실된 궁궐의 재건을 추진하였으나 오히려 노역에 동원된 백성의 불만과 반정의 또 다른 명분을 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궁궐 재건은 조선의 어느 군주라도 시급히 해야 했을 사안이었기 때문에 광해군으로서는 그것을 나서서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전 정권에서 해결하지 못한,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사패산 터널 문제, 방폐장 문제, 과거사 재조명과 정부차원에서의 사과, FTA 타결(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등의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수도 이전 추진

  정조가 화성으로 수도 이전을 하려 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광해군이 수도 이전을 추진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광해군은 경기도 파주 교하 일대에 신도읍지 건설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왜란 이후 민간에 널리 퍼졌던 풍수지리에 입각한 이씨왕조멸망설(정씨가 왕이 된다는)을 일축시키고 사회 전반을 쇄신하기 위해 추진하려 했으나, 전쟁 후 피폐함과 흉년으로 인해 백성의 불만과 인플레이션 유발을 걱정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광해군이 물러남에 따라 정조의 시도가 있기까지 수도 이전은 거론되지 못했습니다. 수도 이전은 안보를 위해서, 경제를 위해서 긍정적 이유로 추진하려 했지만 당시 상황이 허락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금 다른 상황이기는 하지만 수도권과 지방의 차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져서 각종 문제에 시달리는 수도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도 수도 이전을 추진하였으나, 기득권층의 반발에 헌법소원까지 가는 과정에서 위헌으로 판결이 나 행정수도로 일부 행정기관을 이동하는 선으로 추진하게 됩니다.

작은 나라,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빛난 자주적 실리외교

 이미 중화주의로 조선 지배층 사대부들이 받들던 명나라는 나라가 기울어가고 있었고, 반대편에서 서양문물을 흡수한 중화주의자들이 오랑캐로 적대시하던 청(후금)은 커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광해군은 명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또한 청의 도발을 막을 수 있는 양국을 오가는 자주적 실리외교에 힘쓰게 됩니다. 사대주의와 성리학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조선의 왕으로서는 파격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의 외교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의리든 명분이든 조선 지배논리에 입각해 명을 돕게 되면, 안 그래도 어려운 전란 이후 나라상황에서 엄청난 국가적 손실과 존망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국제정세에 관한 날카로운 분석력과 소신과 결단력으로 외교를 추진했습니다. 당시 신료들 중 외교전문가가 없는 와중에 일일이 외교를 챙겼다고 합니다.

 다급해진 명의 요청에 강홍립을 마지못해 파견하나 이미 청의 누루하치와 비밀조약을 통해 출정 제스쳐만 취하고 항복을 하는 실리적 선택을 하게 됩니다. 즉, 내부의 사림과 명의 명분을 잡고 청과 비밀협약으로 실리까지 챙기는 그야말로 대국 사이의 작은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군주였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끊겼던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시켜 남아 있던 왜국과의 전쟁위협을 해소하고 경제적 이용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노무현 대통령도 실리외교 자원외교로 대표되는 외교를 통해 한반도를 가운데 놓고 벌어지는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특히 북한과 정상회담을 김대중 정부에 이어 성사시킬 정도로 남북관계도 좋게 유지하며 유라시아 경제권, 북한과 연계한 대륙과 이어지는 횡단열차, 북한의 막대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한반도의 새로운 경제를 위해 또한 평화를 위해 외교를 실행합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원 확보에 힘써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고 무엇보다 세계 어느 곳 모든 지도자들에게 신뢰를 확보하였고, 미국이 서서히 힘이 떨어진다는 것에 대비해 EU로 대표되는 유럽 그리고 중국 등 새로운 쪽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광해군이 외교를 직접 챙긴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 또한 내치는 책임총리제로 총리에게 챙기게 하고 자신은 외교와 굵직한 현안 해결에 힘쓴 것입니다.

 지난해 12월 28일 Howard W. French라는 기자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에 노무현 정부의 외교성과에 대해 “동아시아 문제를 다루는 소수의 전문가들을 제외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감당한 역할을 이해할 만한 미국인들은 별로 없다. 확실한 것은 한국에서 선출된 지도자가 북한 위기에 대해 어떠한 군사적 해결도 반대한다고 천명함으로써 미국 정부는 점진적으로 외교적 수단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다른 실질적인 방안을 강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중략> 미국과 북한은 결국 협상을 통해 핵확산 문제와 궁극적 관계정상화에 관해 보기 드문 외교적 이해에 이르렀다” “그는 변방에 있는 작은 국가의 지도자였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라고 극찬하며 평가 했습니다

 또한 마이클 그린 전 백악관 보좌관은 중앙일보에 부시와 노무현의 비화를 밝히며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친미 대통령이었던)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라고 평가하며 “중국이 미국 측에 아시아에서 미국을 주축으로 對中 친미동맹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그 동맹국으로 일본,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을 언급하면서 한국만 쏙 뺐다”고 일화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한미 관계에 관심이 있는 미국 기자의 눈에나 부시의 고급관료 눈에 비친 노무현 대통령은 강대국 미국에 대해 굽히지 않고 냉온전략을 사용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한미 동맹관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으며 그 와중에도 북한, 중국과도 척을 지지 않는 훌륭한 양면외교를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국익을 지키려다 사대주의자들에게 쫓겨나 일개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현대에 와서야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양면외교 솜씨를 인정받고 당쟁의 희생자로 불리는 광해군 이혼(李琿)과 노무현, 둘은 그렇게 닮아있습니다.

 세력이 없는 정권

  광해군 정권의 주 인물들은 대북파로 불리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사대부에서 비주류에 속하는 인물들로, 몰락해가던 서인과 같은 북인에서 갈라져 나온 소북파 등과 적대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참여정부시절 이른바 노무현 세력은 보수세력에는 좌파빨갱이로, 진보세력에는 보수자유주의 세력으로 비춰집니다. 이 당시도 마찬가지여서 대북세력은 명분을 외면한 위험한 세력으로 비춰져, 참여정부 당시 한나라당과 민노당으로 대표되는(지금은 민노와 진보신당으로 나뉘었지만) 극과 극이 참여정부를 헐뜯은 것처럼, 소북과 서인 모두의 공격을 받고 결국엔 반정으로 집권세력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최악의 군주 인조, 그와 닮은 이명박

  앞서 언급한 폐비사건으로 대표되는 패륜과 실리외교란 명분 아래 인조는 스스로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인조반정입니다. (연산군 당시 중신들이 반란 후 추대한 중종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리고는 정통성을 위해 광해군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특히 반정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명과의 외교를 강화하고 청을 배척하게 됩니다. 광해군의 외교를 오랑캐와의 외교로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가 되게 한 외교였다 비난하고 외교뿐 아니라 모든 정책에서 광해군과 반대되는 정책을 내놓고 추진합니다. (광해군이 틀려야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광해군의 모든 것을 부인합니다)

 400년 후 이 땅에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명박을 대표로 하는 한나라당 정권은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평가하고 ‘Anything But Roh’로 대표되는 참여정부 길게는 국민의 정부와 반대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는 곧 국가적 피해, 국민적 피해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400년 전 백성이 광해군을 인정하고 인조를 무시한 것처럼 지금 이 땅에서 자신들의 손으로 대통령을 만들긴 했지만 다시 국민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하고 이명박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독재정권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IMF를 해결한 민주정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이야기하는 상황은 전란을 무사히 복구하고 다시 안정화시킨 광해군을 폭군으로 묘사한 상황과 지금과 닮지 않았습니까?

 비슷한 상황은 외교에서도 발생합니다. 인조는 광해군의 ‘친금배명’ 정책을 빌미로 반정을 했는데 명나라는 찬탈로 인식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명나라는 광해군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조선 조정이 광해군을 비하하는 글을 명나라에 지속적으로 보내자 명나라는 “인조의 마음속에는 비단 광해군뿐만 아니라 중국도 없다. 당연히 선유하여 그 죄를 밝혀 조선 백성들로 하여금 속히 반역의 도적을 토벌하고, 폐주를 복위하게 해야 한다. 설령 조선 백성이 인조를 군주로 삼았더라도 당연히 폐위시켜야 한다”라는 답변을 내립니다.

 이에 인조 조정은 “조선의 200년 사대지성이 모두 허위로 돌아갔다. (중략) 과인은 당연히 명과 협력해 기필코 오랑캐를 무찔러 없앨 생각이다”라는 교지를 발표하고 이에 명나라는 사건진상규명단을 보내고 조선 측은 사신에게 은자 약 13만 냥을 접대비로 준비했지만 명나라 사신들은 성에 안 차 개성의 인삼을 요구했고, 조선 측이 그것을 들어주고서야 상황이 일단락됩니다.

 지금의 상황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이명박 정권은 전임정권 시절 악화하지도 않은 오히려 대한민국 래 미 관료 스스로 가장 좋았다던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외치며 이미 막바지인 부시 정권에 예쁘게 보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인조가 접대비에 개성인삼까지 준 것처럼 미국산 쇠고기라는 선물을 안겨준 것은 너무 닮지 않았습니까?

 또한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대외정세를 파악 못 하고 주제넘게 이어진 청을 향한 무시는 지금 북미관계의 회복과 EU의 위상강화, 중국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각종 외교적 결례만을 범하다 북한에 무시당하고, 인조시절 반청을 외친 오버처럼 핵무장까지 언급하는 의원을 가진 정당과 북한을 아직도 탓하는 이명박과 닮지 않았습니까?

 당시 명과 청에 모두 무시당한 인조처럼 지금 미국을 비롯한 북한 중국 러시아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심지어 제3세계로 불리는 국가들에도 무시당하는 이명박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세계의 흐름을 모르고 망해가는 명국에 매달린 인조와 국제질서의 재편과 미국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흑인은 대통령이 안 될 거라 판단하고 부시와 공화당에 올인한 이명박정권은 쌍둥이지 않습니까?

 광해군이 간신히 회복한 조선은 인조 이후 사실상 끝이 나버렸습니다.(물론 비운의 소현세자나 정조가 제대로 살았다면 모를 일이지, 이들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왕비나 대신 등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권은 축소되는 몰락기의 왕조였습니다.)

 웬 광해군과 노무현 대통령을 비교하느냐 실망하거나 기분 나쁜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가 승자의 것이기 때문에 광해군은 묘호를 가지지 못한 것이고 인조는 ‘조’의 시호를 받은 것입니다. (광해군이 묘호가 생기면 인조의 정통성은 물론 이후 군왕들의 정통성도 없어지므로 조선 최고의 왕인 세종도 ‘조’가 아닌 종인데 최악 임금들인 선조나 인조는 ‘조’이므로 묘호로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제대로 평가된다면 광해군은 군이 아닌 ‘조’가 붙어야 하고 인조가 군이 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묘호는 후대 왕이 정하는 것이므로 안타까운 결과로 지금까지 이어지지만)

 광해군이 최근 들어 재평가 받는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도 언젠가는 나오리라 믿습니다. 또 광해군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서가 아니라 빠른 시일에 나오기를 희망하며 그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Issue & Opinion] - 노무현 전 대통령, 日 독도 도발에 발포 명령?
[Culture & History/Talk to History] - 역대 대통령들의 혈액형은?

※ 저작권에 대한 내용 본 블로그의 공지사항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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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숨을 구했다?

 



 5.18 민주화운동을 배후 조종했다며 `내란음모' 주동자로 몰려 사형이 확정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목숨을 건지는 데 당시 교황이 크게 기여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문서가 공개됐다고 합니다.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자료에 따르면 당시 교황인 고(故) 요한 바오로 2세는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전 대통령의 감형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1980년 12월11일자로 보냈습니다.





   한편 감형 소식에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시 全 전 대통령 앞으로 같은 해 2월14일자 `교황 친서'를 보내 "각하께서 신속히 배려해 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각하께 최대의 경의를 표하며 훌륭한 한국 국민들에게 신의 가호와 은혜가 있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고 나서 1982년 형 집행정지를 받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으며, 1987년 사면.복권되고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이듬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자료와 관련해 김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당시 국제 사회의 구명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 김 전 대통령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며 "구명운동에 교황청이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자료"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연합뉴스에 의하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1980년 신군부가 정권 탈취 과정에서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이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조작한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해 고(故) 문익환 목사와 이해찬 전 총리 등 당시 민주화 인사 24명이 연루돼 고초를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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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전 복원 성공, 조선 최대의 로켓 무기 발사?


15세기 최대의 로켓무기인 대신기전이 복원·발사돼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복원팀을 이끌고 있는 충남대 항공우주공학과 허환일 교수는 지난해 9월과 11월 두 차례 김해 낙동강 근처에서 대신기전의 발사 실험을 진행한 결과 1차 실험에서는 600~700m를, 2차 실험에서는 900~1,000m를 날아가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습니다.

1448년 제작된 대신기전은 총길이 5.6m, 무게 4~5kg에, 비행거리는 약 1km에 달합니다.

몸통은 대나무를 사용했으며, 아래에는 종이로 만든 화약통이 부착돼 있고 끝부분에는 깃털 또는 가죽을 이용한 날개가 달려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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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한강 대홍수를 기억하십니까?

 


 1990년 9월 9일부터 12일까지 한강 전역(중부지방)에 많은 비가 집중적으로 내렸다. 경기도 이천 581mm, 수원 529mm, 강화 512mm, 홍천 508mm, 양평 491mm. 서울 486mm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경기도 이천, 수원의 시간당 최대강우량은 각각 59mm와 56mm, 1일 최대강우량은 경기도 수원이 296.3mm가 내렸다.

 1990년 9월 9일부터 12일까지 사흘간 중부지방의 집중호우는 평균 452mm의 강우량을 기록하면서 곳곳에 크고 작은 많은 수해를 발생시켰고, 한강 수위는 집중호우와 한강수계 댐들의 방류량 증가로 인도교 수위는 11.27m을 기록했다.
 
 이 홍수로 인하여 한강하류의 수위는 급상승하였고 일산제방의 하단이 무너져 고양군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던 한강의 제방붕괴를 발생시킨 대표적인 홍수로 기록되고 있다. 한강의 격류가 고양군 지도읍 신평리 강둑을 무너뜨리며 쏟아져 들어가 민가와 농지를 덮으며 계속 능곡과 일산쪽으로 퍼져나가 수막산까지 물바다를 이루었다. 지붕만 보이는 민가에는 가축들과 미처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이 지붕위로 올라가 구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농경지 5,000여ha가 침수되었으며 불의의 사고로 이재민이 된 5만여명의 주민들은 행주산성 등 인근 고지대로 대피했으나 다수의 주민들은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물바다 한가운데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강 대홍수로 인하여 126명이 사망하고 37명이 실종되었으며, 187,265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5,203억원의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1990년의 ‘한강 대홍수’가 계기가 되어 동강댐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영월댐 건설이 추진됐지만, 청정지역인 동강을 보전해야 한다는 환경단체의 강력한 반발에 때문에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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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국토의 대동맥’이라 불리는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기록과 현장을 자료로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
국가기록원은 경부고속도로에 관한 주요 소장기록물을 콘텐츠로 개발해 경부고속도로 전구간 개통일에 맞춰 7월 7일(화)부터 나라기록포털(contents.archives.go.kr)을 통해 제공한다고 밝혔다.

 경부고속도로 콘텐츠는 국가 기록을 지식자원화하고 국민들이 쉽게 활용하도록 하기 위해 개발된 것으로, 전국을 1일 생활권화하고 경제성장에 중추적 기능을 담당한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계획부터 준공까지의 다양한 모습을 기록물을 통해 재구성했다. 
 

 이 콘텐츠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전모를 보여주기 위해 건설 계획, 노선 결정과 구간별 공사과정, 준공의 효과와 의미 등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와 관련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의 대표적인 문서ㆍ사진ㆍ동영상 등 500여 점을 소개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 관련 기념식사, 개통식 때 사용한 대형 가위, 우표 등 다양한 자료를 곁들이고, 개통 이후의 연도별 통행요금을 비롯한 각종 통계, 연표 등도 풍부하게 소개해 보는 재미와 자료적 가치를 더했다.

 박상덕 국가기록원장은 “국토개발의 근간사업이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 관련 기록물을 콘텐츠로 개발해 기록을 통해 국가 발전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국가 기록이 정책수립ㆍ교육현장ㆍ학술연구 등 다방면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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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답사의 모든 것

 


1. 답사와 답사의 종류

내력 있는 곳을 찾아가서 삶의 흔적을 더듬고 역사를 되새김으로써 그 지역의 자연․역사․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며, 나아가서 자신을 돌이켜보는 기회를 만드는 일이다.

문화유적지 답사, 역사유적지 답사, 향토유물 답사, 종교유적지 답사 등이 있다. 대표적인 문화유적 답사에는 고궁, 수원 화성, 중원 문화유적지, 박물관 및 전시관 탐방 등이 있으며, 역사유적 답사에는 서대문독립공원, 동학농민운동이나 임진왜란의 사적지,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알 수 있는 강화도 탐방 등이 있다. 향토유물 답사에는 남도 문화와 역사, 진도 사람의 삶과 문화, 섬 문화와 섬 사람들, 도자기 굽는 마을 탐방, 방언이나 옛날 이야기 수집 등을 테마로 한 기행이 있고, 절두산성지, 양화진, 제암리 교회, 발암 시장, 여수애양원 등이 종교유적 답사지의 대표격으로 꼽힌다.(네이버 지식인 참고)

 

2. 우리나라의 현재 답사문화의 문제점

우리나라 사람들은 답사의 개념이 정확하지 않는 것 같다. 답사와 여행의 의미를 혼돈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가장 처음 답사를 하는 것이 바로 초등학교 수학 여행일 것이다. 물론 요즘은 부모님과 함께 유명한 곳을 찾아가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답사는 바로 초등학교 수학여행이라고 생각된다.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경주를 수학여행지로 정하고 있다. 물론 경주가 우리나라 최고의 수학여행지 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수학여행을 가기 전에 목적지에 대해 별도의 공부를 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아이들은 주로‘경주는 옛날 신라의 수도였다.‘라는 얇은 지식을 가지고 목적지에 가게 되는 것이다. 수학여행은 2박 3일 동안의 짧은 여행이지만 초등학생들에게 주는 의미는 그 이상으로 아주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뿐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여행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여행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답사문화는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길러진다. 그냥 그 곳에 다녀왔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인 것이다.

“나도 천마총 갔었는데……. 좋더라.” 우리는 이런 대화를 하면서 뿌듯함을 느낀다. 이런 대부분의 답사는 천마총이 경주에 있다는 것밖에 모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한번 가 보았다면 그곳에 대해서 모두 다는 몰라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져야 하지만 현재 우리의 답사문화는 그러하지 못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손에 들고 다니며 쓰는 것을 싫어한다. 초등학교 때 잠깐 선생님의 권유로 연필을 준비한다. 하지만 해외 여행을 가서도 그냥 보기만 하지 무엇을 적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 머리는 컴퓨터가 아니다. 한번보고 그 것을 모두 다 기억하기는 힘이 든다. 그리고 우리가 답사하는 곳이 보통 서너 군데가 넘을 것이다. 그 많은 곳을, 그 많은 곳의 유물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제 이런 답사 문화는 우리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보다 효율적이고 알찬 답사를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3. 올바른 답사를 위한 제안.

 

1) 답사의 주제 정하기

논설문도 아니고 답사의 주제를 정한다는 것이 의아하다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답사에도 주제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오랜 시간 답사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답사를 위해서 주제를 정하는 것이 좋다.

‘천년 신라의 경주’, ‘아름다운 섬 제주’와 같이 주제를 너무 크게 잡는다면 주제를 정하는 의미를 상실 할 수도 있다. 주제는 일정과 맞게 작을수록 더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경주의 신라고분들’,‘제주도의 향토음식’과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잡는 다면 분명 답사에서 얻어 오는 것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답사 전 자료조사

답사의 주제를 정하고 주제에 맞는 답사를 하기 위해 답사 전 자료조사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답사 전 자료 조사를 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보다 많은 사실과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답사 전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유적이나 유물을 본다면 이해력이 매우 떨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천마총을 모르는 상태에서 답사했다면 그냥 신라인들은 무덤을 크게 만들었다는 것밖에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사전 자료조사를 하면 천마총이 천마도가 나와서 천마총이라는 것과 천마도는 신라의 흔하지 않는 회화작품이라서 더욱 귀중하다는 것, 그리고 무덤형태는 적석목곽분이고 천마총 안에서 금제 허리띠. 금관등 많은 금제 유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간다면 감동은 열 배가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주제에 맞는 장소를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답사의 목적은 신라의 고분인데 그냥 자료조사 없이 여행한다면 천마총을 비롯해서 대릉원, 무열왕릉, 김유신 묘, 오릉 등 무수히 많은 고분들을 지나 칠 수도 있다. 이처럼 답사 전 자료조사는 답사를 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다.

 

3) 답사 예산 및 답사 일정

우리가 집을 나서면 돈이 들게 마련이다. 물론 답사를 할 때도 돈이 든다. 우리가 부자가 아니라면 알뜰하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답사가 되어야한다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치밀한 답사일정과 거기에 맞는 예산을 적절히 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전 자료 조사는 답사의 유물과 유적지뿐만 아니라 예산과 관련한 식비. 숙박비, 교통비와 같은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일정표와 예산표를 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일정․예산표

시각

장소

수입

지출

잔액

09:00

경주역

회비5만원 * 4명 =20만원

0

20만원

09:30

대릉원

 

입장료1500원*4명=6000원

19만4천원

11:00

 

자전거 5천원*4명=2만원

17만4천원

11:30

김유신장군묘

 

입장료500원*4명=2000원

음료수1000원*4명=4000원

16만8천원

12:30

점심식사

 

10000원 *4명=4만원(음료)

12만8천원

13:30

무열왕릉

 

입장료1000원*4명=4천원

12만 4천원

 

위의 예산․일정표는 예로 간단히 짜 보았다. 일정표와 예산은 아주 자세히 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예산은 조금 넉넉히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답사 중 예상치 못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정표 역시 약간 넉넉히 하는 것이 보다 좋은 답사가 될 것이다.

 4) 준비물 준비

꼼꼼히 준비물을 준비하는 것은 답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메모지와 필기 도구, 카메라는 기본일 것이다. 그리고 지도는 준비해 가는 것이 좋지만 답사하는 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지역의 알맞은 지도는 그 곳에서 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상약을 준비하는 것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계절에 맞는 의복과 여벌의 옷 등 여행을 할 때와 같이 꼼꼼히 준비 해야할 것이다.

 5) 답사 중 주의점

자신이 철저한 준비와 자료조사가 되었다면 이제 답사하는 것만이 남았다고 생각된다. 답사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 보다 더 값진 것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냥 보는 것 외에 사진을 찍어 그 모습을 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유적에는 유적을 설명하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 것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안내원이나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의하는 것 또한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우수한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나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고분이나 잔디밭에 올라가는 행위는 우리가 답사를 하는 동안 하지 말아야 할 행동 중 하나이다. 박물관이나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공공장소에서 휴대폰 통화나 시끄럽게 떠드는 행위도 주의해야 할 점이다.

많은 것을 얻어오는 답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꼭 지켜야하는 답사예절이라고 생각된다.

 6) 답사를 다녀와서

답사를 다녀와서 “아! 다녀왔는데 좋더라”로 끝이 나면 안될 것이다. 답사보고서나 기행문을 쓰면서 다시 한번 답사의 감동을 느끼는 것, 또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올바른 답사를 위한 제안 중 하나 일 것이다. 자신이 전문성을 가지는 답사를 했다면 보고서를, 전문성보다 감동을 주는 답사를 했다면 기행문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사진 자료를 잘 정리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아쉬운 점을 기록하고 다음 2차 답사를 준비하거나 다른 답사를 할 때 유용하게 쓰면 더욱 알찬 답사가 될 것이다.

 4. 결론

지금 까지 나름대로 올바른 답사문화에 대한 제안을 해 보았다. 물론 힘들겠지만 이렇게 한다면 보다 좋은 답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올바른 답사문화에 대한 제안’을 하면서 나름대로 하나의 정의를 하고 싶다. 답사란 세 가지가 중요하다. 답사 전 철저한 준비, 답사 중 올바른 답사 행위, 답사 후 답사를 정리하는 보고서나 기행문.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답사가 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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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리에 사용된 황제 어새 보물 확정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이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의 보물 지정을 확정하고 내일(9월 1일) 관보에 지정 고시한다고 합니다.

 이번에 고시하는 보물 제1618호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는 전체높이 4.8㎝, 가로 5.3㎝, 세로 5.3㎝, 무게 794g의 크기로 합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손잡이는 거북이 형태이고 인면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글씨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어새와 함께 보물이 된 내함은 황동으로 만들어졌으며 특이하게 내부에 인주함이 들어 있습니다.

 문화재청측은 "이번 '황제 어새' 보물 지정은 고종 황제가 일본의 국권침탈 위협에 대항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펼친 주권수호운동의 중대한 역사를 증명하고, 이 시기 우리 역사의 실체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데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 사용례>


 (1) 1903년 11월 23일 이탈리아(義國) 君主에게 보낸 親書

 (2) 1904년 7월 1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3) 1904년 9월 6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4) 1904년 11월 20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5) 1905년 1월 10일 러시아 황제에게 비밀리에 보낸 친서

 (6) 1905년 4월 3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7) 1905년 11월 18일 이후 알렌 주한 공사에게 보낸 백지 친서

 (8) 1906년 1월 독일 황제에게 보낸 친서

 (9) 1906년 6월 22일 호머 헐버트를 친서 전달 특별위원으로 임명하는 위임장

 (10) 1906년 6월 22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5개국 국가원수들(러시아, 이태리, 프랑스, 오스트리- 헝가리, 독일)에게 보낸 친서(5점)

 (11) 1906년 11월 1일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2) 1907넌 4월 20일 러시아 황제에게 비밀리에 보낸 친서

 (13) 1909년 1월 1일 호머 헐버트에게 미국에 유학 간 조카(조남복)를 잘 돌보아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

 (14) 1909년 10월 20일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한 재산을 찾기 위해 호머 헐버트에게 준 친서 위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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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세자의 다이어트 비법?



대한민국은 이미 남녀노소 거의 모든 국민들이 다이어트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인데요.
오래 전 조선시대, 그것도 세자가 다이어트를 했다는 기록이 발견돼 화제입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다이어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었습니다.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世宗常命大臣曰: ‘世子多膚, 常令習步內庭, 乘馬後園, 至令放鷹, 以通血氣。’ 今上常居深宮, 未嘗行氣, 故一有動勞, 便至違豫, 當散步宮內, 或時御馬, 常常行氣,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종께서 항상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자는 뚱뚱하니 항상 궁궐에서 걸음을 걷게 하고, 후원에서 말을 타게 하며, 매를 놓아 사냥하는데 참여하도록 하여 혈기를 통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항상 깊은 궁중에 계시고 일찍이 운동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몸을 한 번 움직여 피로하게 되면 바로 병환이 나십니다. 마땅히 궁궐 안에서 산보를 하시고 때로는 말을 타시어서 항상 운동을 하시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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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영화나 소설에서나 가끔 엿볼 수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실 현실속에서, 특히 우리나라의 상류층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기대하는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혹시 조선시대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비슷한 개념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있었다. 조선왕조 실록 정조편에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사례가 잘 나타나 있다.

우연히 발견한 조선왕조의 독특한 기록을 읽으며
대한민국의 상류층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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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남성 출산휴가가 있었다?

출산휴가, 남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까요?

관련 법 조항을 살펴보니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제 3장 18조의 2(배우자출산휴가)에따르면,
1.사업주는 근로자가 배우자의 출산을 이유로 휴가를 청구하는 경우에 3일의 휴가를 주어야한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대기업을 비롯한 일부 기업에서는 3일의 휴가를 인정해주고는 있는데
그렇지 못한 곳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21세기에도 생소한 남자들의 출산휴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면 믿으시겠어요?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남자도 출산휴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노르웨이 같은 복지 선진국들처럼 우리나라의 출산휴가도 확대된다면 출산 장려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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