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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답사기 - 신라의 천년고도를 만나다.

역사&문화/Talk to History

by 편집국장 2009. 7. 2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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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처음 간 곳은 국립 경주 박물관. 도착하니 최경숙 교수님과 조교님이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이 곳은 어릴 때부터 여러번 와본 곳이지만 그 날은 죽은 박물관이 아닌, 살아있는 국립 경주 박물관과 대화를 해 볼 참이였다. 그러나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박물관을 잘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이다. 아이를 녹여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카이스트의 성분 분석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나는 예전에 들은 에밀레종의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직접 타종된 것은 아니고 녹음된 것이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었다. 시간관계상 나는 에밀레종 앞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에밀레종 이외에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두개의 금관이었다. 고등학교 때 읽은 ‘역사스페셜’이라는 책에서 본대로 금관의 모양은 사슴 뿔이 두 개 그리고 나무가 세 그루였다. 두개의 사슴뿔은 토테미즘의 흔적인데, 나무의 의미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또한 신라의 금관은 왕이 평소에 착용하던 것이 아니라 장례용이라고 한다. 역시 시간관계상 금관을 지나쳐 다른 것들을 차례로 보았다. 유홍준 교수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유물에는 관심이 생겼지만 내가 전혀 모르는 유물은 그냥 보고 지나치게 되었다. 부산에 돌아가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을 나와 우리는 차도를 따라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넓은 터가 나왔다. 이곳이 반월성터. 신라 궁전의 일부였다는 이 곳이 지금은 숲이 우거지고 풀이 나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했다. 야은 길재의 ‘오백년 도읍지를’이라는 시조가 떠오르는 순간 이였다. 우리는 이 곳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을 먹고 월성 안에 있는 석빙고로 달려갔다. 한 여름에도 거의 완벽하게 얼음을 저장했다는 석빙고는 안타깝게도 입구에 철문이 설치되어 잠겨있었다. 사전조사에 따르면 선조들은 매년 2월말 강가에서 얼음을 잘라서 저장한 뒤 6월부터 10월까지 수시로 그 얼음을 꺼내 더위를 물리쳤다고 한다. 현존하는 6개의 석빙고의 하나인 이곳도 두 단계의 과정을 통해 얼음을 저장했을 것이다. 1단계는 얼음 저장에 앞서 겨울 내내 내부를 냉각시키는 것이고, 2단계는 얼음을 넣은 뒤 7~8개월 동안 얼음을 녹지 않게 저장하는 것이다. 우선 1단계의 과정에 숨어있는 비밀은 바로 출입문 옆에 있는 날개벽이다. 겨울에 찬 바람은 이 곳에 부딪쳐 소용돌이로 변하고 이 소용돌이는 빠르고 힘차게 내부 깊은 곳 까지 밀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철 보통의 지하실 온도가 섭씨 15도인 것에 비하여 석빙고 내부 기온은 영하 0.5도에서 영상 2도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얼음을 어떻게 보존하는가인데 실재로 석빙고 안의 얼음은 녹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거의 미미할 정도로 녹았을 뿐이다. 이렇게 찬 기온을 유지한 데는 3가지 열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절묘한 천장 구조이다. 화강암의 천장은 1-2 미터의 간격을 두고 4.5개의 아치형 모양으로 만들어져 그 사이에는 움푹 들어간 빈 공간이 있다. 이곳이 바로 내부의 더운 공기를 빼내는 일종의 에어포켓인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환기구이다. 위쪽에 설치된 환기구는 에어포켓에 갇힌 더운 공기를 밖으로 빼낸다. 이것은 바로 더운 공기는 위로 뜬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석빙고 내부의 온도는 한여름에도 0도 안팎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다 3번째는 얼음에 치명적인 물과 습기를 빠르게 밖으로 빼내는 배수로이다. 또한 빗물을 막기 위하여 석빙고 외부에 석회와 진흙으로 방수층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음과 벽 및 천장 틈 사이에는 밀집, 왕겨, 톱밥 등을 단열재로 채워 넣어 외부열기를 차단하였다. 거기에다 외부의 잔디는 햇빛을 흐트러뜨려 열 전달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으니 석빙고의 얼음은 한여름에도 거의 녹지 않고 견디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것들을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석빙고 입구를 막고 있는 철문이 원망스러웠다. 어쨌든 선조들의 지혜에 경외감이 들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시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쯤 걸었을까. 우리는 곧 고풍스러운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김알지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계림이었다. 한번도 가본적은 없었지만 김알지의 설화는 익히 알고 있었다. 최경숙 교수님이 설명하실 때 박혁거세의 설화가 얽힌 곳이라고 해서 의아했었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맞았다. 아마 교수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듯 하다. 이미 녹초가 되어있던 나는 계림의 멋들어진 나무들과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벤치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러나 휴식도 잠시 우리는 또 다시 걸어야 했다. 좌우로 커다란 봉분들을 지나 도착한 것은 내물왕릉. 중․고등학교 때 많이 듣던 왕중의 하나 인데 별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내물왕 때부터 중국문화를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정도밖에는. 거대한 내물왕릉을 지나 천마총에 도착했다. 이 곳은 6학년 수학여행 때 한번 와 본적이 있어서 이번이 두 번째였다. 몇 점 안되는 유물들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천마총 입구에는 에어커튼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피곤과 더위에 힘겨워 하던 나에겐 에어커튼에서 나오는 바람이 감로수처럼 느껴졌다.

 


 다음 목적지는 안압지. 역시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와 본적은 있었지만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연못이라는 뜻의 안압지라는 이름은 신라가 망하고 폐허로 변한 한참 뒤에 조선시대 묵객들이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하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다닌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674년에 안압지가 조성된 것으로 되어있는데 여기에 한가지 의문이 드는 점이 있다. 674년이면 나․당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때로 알고 있는데 그럼 전쟁 중에 대규모 공사를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봤지만 아직 대답이 올라오질 않았다. 권덕영 교수님께서 내 글을 읽고 의문을 시원하게 대답해주시리라 굳게 믿는다.

 이번 경주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황룡사지였다. 한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교과서나 여러 참고서에서 많이 봤었던 곳이다. 사진에서 보던대로 13세기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려 넓은 벌판에 주춧돌들만 보였다. 비록 실물은 볼 수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은 나로 하여금 황룡사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백제의 미륵사와 비견될 만한 거대한 규모와 신라 삼보중 하나인 거대한 9층 목탑 등 신라 제일의 국찰의 기상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정말 너무 피곤했지만 이렇게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경험을 나는 정말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 젊음을 무기 삼아 앞으로도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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